"소원? 가족들 건강하고 잘 묵고사는 것뿐 더 있나"
신새벽. 시장이 다시 꿈틀대며 살아난다. 새벽짐을 부려놓은 화물차들이 분주하게 가고난 다음 시장은 상인들이 하나 둘씩 몰려들면서 다시 생기를 되찾는다.
무자년 새해 첫 새벽. 대구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칠성시장'을 찾았다. 영하 5℃밖에 안 되는 기온과 달리 겨울바람이 불어 체감온도는 시베리아 벌판이 따로 없었다. 그래선가 새벽장을 보러온 사람들의 발길은 뜸했다. 시장사람들도 장사는 뒷전, 군데군데 피워놓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추위를 피할 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1
"특별한 희망이야 뭐 있나. 금년에는 다 잘됐으면 좋겠다. 내사 그럭저럭 살아도 그만이지만 우리나라 국운이 좀 살아났으면 안 좋겠나." 모닥불을 쬐던 김길웅(65) 씨는 이 바닥에서는 젊은 축에 든다. 바로 곁에 있던 강명자(69·여) 씨는 "야채 장사한 지 40년째"라면서 올해 마흔이 다 되어가는 아들이 제발 장가갔으면 좋겠다며 손주 보고 싶다는 희망사항을 첫 번째로 꼽았다.
장사 이야기를 꺼내자 손사래부터 친다. "10만 원어치 야채를 받아놨는데 아직 1천 원도 못 팔았어. 재래시장은 다 죽었지. 장사가 안 돼. 젊은 사람들은 '홈… 뭐다' 하는 대형마트나 들락거리지 재래시장은 우리처럼 늙은이들만 오잖아. 지금은 장사가 잘 안 돼." 푸념이 길어진다.
그래도 곳곳에서 조금 있으면 경제가 좋아지지 않을까 기대섞인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강 씨와 단짝인 구영희(68) 씨는 "올해는 새 대통령이 들어서니까 정치 잘하면 경제가 살아나지 않겠나."고 한마디 내뱉는다. 여기저기서 맞장구가 튀어나온다. 구 할머니는 "내 한 몸 건강하고 아들도 건강하고 돈 없어도 잘 묵고 살고 하면 되지 별 욕심이 없다."며 "열심히 살면 그게 다다."고 짤막하게 새해 희망을 밝혔다.
다른 사람들은 누구보다 먼저 해맞이하러 동해바다로 가고 하다 못해 주변 산이라도 가는데 하루쯤 쉬고 새해를 맞이하는 건 어떠냐고 권했다. "우리야 수십 년 시장바닥에서 일하는데 뭐하러 꾸역꾸역 바다까지 가느냐. 우린 해마다 여기서 해뜨는 거 보면서 장사해왔어."
옆에 서 있던 '커피아지매'가 춥다며 커피 한잔을 재빨리 타내온다. 재래시장에서는 아직 인정이 메마르지 않았다. 아지매는 "자기 서있는 위치에서 열심히 하는 게 제일 아름답지."라며 소박하게 올해 희망을 내뱉었다. 돈 많이 버셨냐는 질문에 옆에 있는 아지매들이 "아이고 이이는 시장에 나온 지 얼매 안 되고 아직도 셋방에 살고 있다."며 커피아지매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는다.
#2
해맞이 이야기로 넘어가자 우리도 해뜨는 거 좀 보자며 새삼스럽게 일출시간을 서로 물어본다. 여차 하면 장사 파하고 신천변으로 가서 일출장면을 볼 자세다. 그때 김우정(68) 씨가 "해는 어디 있다가 살그머니 바다에서 떠오르냐?"며 궁금해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설명해 주다가 "새해 첫날 떠오르는 해는 특별하다."고 한마디 덧붙였다.
깻잎 장사로 한몫 벌었다는 남후식(75) 할아버지가 입바른 소리를 하며 끼어든다. "전체적으로 경제가 살아나야 재래시장이 살아나지. 경제라는 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어서 재래시장만 살린다고 해봤자 안 된다." 젊었을 때는 시장바닥의 송사는 다 정리해버렸을 법한 논리적인 말솜씨다. "아, 이 양반, 힘도 세고 건강하지. 장사해서 돈도 많이 벌고 또 운전도 잘해."라며 야채장사한다는 한 아지매가 칭찬을 늘어놓는다. 남 할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래도 건강하고 집안이 편안한 게 제일이다."는 한마디를 빠뜨리지 않았다.
시장 안쪽 어물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좌판 가득 대합을 재빠른 손놀림으로 하나씩 까고 있던 민성순(62) 씨는 "소원이야 첫째가 건강이고 장사 잘되는 것이지. 대통령도 바뀌고 경제 살리자고 하는데 잘 될 것 같다."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는다. 민 씨는 "거기에 희망을 걸고 산다. 그래서 마음이 좀 편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장사 잘 되느냐고 묻자 옆에 있던 이남임(62) 씨는 "지금까지 미역줄거리 몇 개 고작 팔았다."고 받았다. 그녀는 "우린 오전 4시에 나와서 오후 6시까지 일하는데 그래도 돈이 안 된다."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데 허리 졸라 매고 사니까 자식 공부시키고 다 할 수 있었다."고 너스레를 떤다. 푸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시장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왔다.
#3
먼동이 터오면서 모닥불도 힘을 잃었다. 목소리 큰 도라지 김(60) 씨 아저씨. 도라지장사로 이골이 났다는 그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말하는 게 신뢰가 간다. 잘 될 것 같다."며 "대통령 바뀌면 규제 좀 풀어야 한다."며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대구에는 공장다운 공장도 없다. 다 외국에 가는데 국내에 공장을 지으려면 서류가 40개 이상이 필요한데 그러니 공장 여기서 안 할라칸다."
스카프로 얼굴을 온통 싸맨 한 아지매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면서 "어데 방송국에서 나왔느냐. 나도 좀 찍어주지…."라고 말했다. "선거도 끝났는데 찍긴 뭘 찍노."라는 핀잔에도 아지매는 미소를 거두지 않는다.
할 말이 있는 눈치다. 칠성시장에서 모르면 간첩이라는 '정구지(부추)아지매' 정회심(56) 씨다. "아프지 않고 정구지 많이 팔면 좋지요. 내 잘 묵고 살 수 있도록만 해주이소." 새해라고 특별한 소망은 없다. 하긴 그녀는 하루 매상 목표를 딱 정해 놓고 다 팔 때까지 집에 안 가고 시장바닥을 지킬 정도로 지독하다.
#4
바깥보다는 덜 추웠지만 시장내 상가는 썰렁했다. 다들 해맞이 한다고 쉬거나 느지막이 나오기 때문이다.
유명한 보리밥 식당도 아직은 아침손님이 뜸하다. 화원에서 해맞이하러 나왔다가 허기를 달래러 나온 50대 아저씨 외에는 없다. "새해 첫 새벽 아침밥을 보리밥 한 숟갈 먹는 것도 꽤나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칠성시장에 왔다는 그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기로 했다."면서도 "새해 새로운 목표를 세웠지만 아직은 밝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무자년 새해 첫 새벽, 칠성시장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시장 사람들이나 시장을 내집마냥 드나드는 서민들이나 소원은 한결같았다. '건강하고 가족들 편안하고 그리고 잘먹고 사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바깥으로 다시 나오자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건너편 노점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시장 상인들. 부지런하게 해돋이 보러 갔다왔다는 한 아지매는 "(해맞이하면서) 돈 많이 벌어달라고 빈 적은 한 번도 없다."며 "건강하면 돈이 천지인데 뭐하러 빌겠어."라고 말했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 50년째 시장통 국숫집 김노미 할머니
"많이 팔아야 되는데 그기 잘 되겠나?"
가지런히 썬 칼국수 다발을 옆에 쌓아두고 반죽을 떼어 수제비용 새알을 빚고 있던 김노미(75) 할머니가 국시 한 그릇 먹고 가라고 붙잡는다. 국시맛은 시장바닥에서 알아주는 솜씨라며 발길을 잡는다. 할머니의 눈빛이 시골에 계신 어머니와 할머니의 그것과 빼다 닮았다. 아들 박석순(45) 씨와 함께 가게를 하는 할머니는 시장바닥에서 국수장사를 해온 지 새해로 딱 50년째란다. 이명박 당선인이 왔다는 얘기를 한다. 대선 때 선거운동차 왔던 이 당선인도 이 집에 들렀다고 했다. 그만큼 이 집도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한 것이다.
"새해라고 뭐 특별한 소원이야 있을게 있나. 내 한 몸 건강하고 아들 돈 많이 벌면 좋겠는데 지가 올케(제대로) 벌 수가 있나."
할머니는 아들 걱정말고도 걱정이 태산이다. 국시 한 그릇에 2천 원밖에 안되는데 밀가루가격이 작년에 오른데다가 올 들어 50% 정도 또 오른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렇다고 야박하게 단 돈 500원이라도 국수값을 올리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다. "몬 올리지. 2천 원 받던 걸 우예 각중에(갑자기) 올리노."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는 고향 안동에서 묻어온 것이다.
말하는 와중에 그녀가 이 시장바닥에서 살아온 세월보다 많은 국수사리와 새알이 한 쪽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녀는 "국수장사 잘 되는 거 그기 소원이지. 다른 건 암 것도 없다."는 말만 거듭했다. 다른 보리밥식당보다도 500원이나 싼 할머니가 가진 유일한 장사수완은 세월따라 가격을 올리지 못하는 둔함에 있는 것 같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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