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전10기 포클레인 기사 "소설가의 꿈 캐냈습니다"

입력 2007-12-31 09:17:19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이종률 씨

"열 번 만에 당선됐습니다. 너무나 기쁩니다."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된 이종률(47) 씨. 그는 9전 10기의 도전 끝에 무자년(戊子年) 새해에는 꿈에도 그리던 등단작가가 된다.

매일신문의 당선통보를 받으면서도 "아는 후배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며 뜻밖의 소식에 너털웃음으로 기쁨을 대신한 이 씨. 쥐띠 해에 꿈을 이룬 쥐띠 작가의 인생여정도 문학만큼이나 극적이다.

고졸 출신으로 늦깎이 등단한 그는 30년 째 굴삭기(포클레인)와 함께 살아오면서도 문학에 대한 꿈을 놓지 않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고교(구미 현일고)를 졸업하고 '먹고 살기 위해' 뛰어든 공사판 일. 그때는 찢어지게 가난했다.

철없는(?) 연애를 하다 도망가 듯 입대한 군에서 제대했을 때는 이미 두 아이의 아빠가 돼 있었다. 한때 자살까지도

생각했던 그는 대구 달성공원 뒤편에 사글세를 얻어 굴삭기 운전대를 잡았다. 그때는 공사판에 버려진 못이 많아 틈나는 대로 주워 팔아 생활비를 대신했다.

어느 날 돈 대신 받아온 고장난 자전거를 수리해 타고 다니면서 더 많은 못을 팔 수 있게 됐다. 그 헌 자전거가 50cc 오토바이가 되고, 포니 승용차로 바뀌더니 어느 날 작은 굴삭기를 구입하게 됐다. "12대의 굴삭기와 덤프트럭을 보유하고 몽골에서도 5대의 굴삭기로 임대사업을 하는 밑거름은 바로 공사판에 버려진 못들이었습니다."

굴삭기를 몬 지 6,7년이 지난 뒤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문학에 대한 꿈이었다. 초교부터 고교까지 문예반에서 활동했던 끼가 살아 꿈틀거렸다. 고교시절에도 등교는 하지 않고 낙동강변 버드나무 아래서 글쓰기를 즐겼던 그다.

굴삭기 핸들을 잡고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꿈을 키워갔다. 한때 시도 많이 썼으나 굴삭기를 몰면서 포기했다. "시는 시상(詩想)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해야 하는데, 굴삭기를 운전하면서는 불가능했죠."

구미지역의 문학모임인 '수요문학교실'에 들어가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했다. 그것이 17년 전이다. 매주 모임에 참여하면서 한편으로 공부에 대한 미련도 밀려왔다. 고졸이 전부인 학력에 대한 배고픔이었다. 방송통신대에 입학하고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에도 참여했다.

그러는 사이 소설들이 하나 둘 쌓이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매일신춘문예를 통한 등단. 지역 문단에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문학활동을 하고, '잘난 배꼽' 등 3권의 소설집을 냈지만 '미등단 작가'라는 오명은 그를 늘 괴롭혔다. 그의 작품이 최종심까지 올라가는 일이 잦아지면서 필력도 해가 다르게 굵고 실팍해졌다. 지난해 낙선한 '바다로 떠난 시인'은 최종심 심사위원들을 무척이나 괴롭혔을 정도이다.

9전 10기였다. 올해 당선작은 '탑리에는 숨 쉬는 비아그라가 있다'. 심사위원들은 "너무 사사로운 담론에 빠진 오늘날의 글쓰기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 통렬하고 신랄하다"는 평을 했다. 힘든 노동현장에서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그에게 띄우는 승전보였다.

그는 "굴삭기를 몰지 않았다면 실패한 시인으로 허무주의자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현장에서 단련된 근육과 문학으로 달궈진 정신. 굴삭기와 문학은 그에게 '거름과 꽃'과 같은 존재였다. "문단의 거목이 되거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보다 내가 만족하는, 나를 위한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올해 낙선했어도 내년에 또 응모했을 것이라는 필명 이홍사. 쥐처럼 근면한 그에게 좌절은 없었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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