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단상]차향

입력 2007-12-27 14:47:24

#차향

경희대학교 정문에서 마흔 두 걸음을 걸어 내려오면 왼쪽에 작은 전통찻집이 있습니다. 찻집이라 표시된 조그마한 간판 아래로 토굴처럼 좁다란 길이 땅속으로 이어집니다. 자칫 머리를 부딪칠 정도의 낮은 입구는 딴 세상으로 가는 통로처럼 기이한 느낌입니다. 한 발짝씩 걸어 계단을 내려가면 끝나는 곳에 웅장한(?) 유리문이 버티고 섰습니다.

차향에 끌린 다객이 문을 밀칩니다. 딸랑딸랑~, 객의 내방을 알리는 방울자매의 전주가 울리자, "어서 오세요" 주인 부부의 부드러운 합창이 이어집니다. 객이 문지방을 넘어 첫발을 딛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 불과 몇 초전까지 번잡하고 헐떡이던 도시가 신선 노니는 무릉도원으로 돌변합니다. 유리문 안은 별천지입니다. 각종 다구들과 소품들이 즐비하고 군데군데 기화이초들이 피었습니다. 심호흡 한 번에 허파꽈리 가득 차향이 찹니다. 전신을 옭죄었던 긴장이 유리문 밖으로 사라지고 신선한 바람 한 자락이 스칩니다.

"물 한잔 드세요" 개량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주인입니다. 얼핏 보기에 갓 서른이나 되었을까? 맑고 깨끗한 피부에 동그란 눈, 무척이나 동안입니다. 미소 머금은 얼굴은 신선의 풍모와 여유로 가득 합니다. 물만 권하고 유유자적 사라지는 모양새는 객의 마음 즐김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배려입니다. 군데군데 담소를 나누는 다객들도 그 소리가 토닥이듯 옆자리를 넘지 않습니다. 그들도 이미 도원의 주인입니다.

한가로운 오후, 딸랑~딸랑~, 경쾌한 방울자매의 교성이 울립니다. 휴식을 취하던 부부신선 습관처럼 일어나 인사를 합니다. "어서 오십-십-십-, 어?" "니-니-니-" "그래 내다" "우와 니 진~짜 오랜 마이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폭발합니다! 눈이 동그래진 단골의 일성, "아니 주인아저씨 경상도분이셨어요?" "내 원래 경상도 사람아이가!" 완전히 돌변한 신선, 품위와 우아함으로 쌓은 그 동안의 내공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됩니다.

25년 만에 만난 친구와 25년 동안 쌓은 공력을 바꾼 것입니다. 상경한지 25년, 모진 세월 속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은 은총이었다고 말합니다. 주(酒)를 혐오하던 친구가 처음으로 주(主)님 대신 주(酒)님을 모셨습니다. 초등학교시절 녀석이 졸라서 간 여름성경학교에서 기도시간을 못 견디고 도망쳐 나왔던 이야기로 밤을 새웁니다. "그때 너 참새 잡겠다고 교회종탑에 올라갔을 때 밑에서 니 떨어지라고 기도했데이" 묵은 이야기의 간절함은 철야기도이상입니다. 맞붙이면 한조각일 것 같은 아내가 안주를 권합니다. 아이와 아내, 그리고 찻집과 교회가 전부라고 주정을 부리는 친구는 여전히 무릉도원의 신선입니다.

이정태(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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