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를 먹는다는 것
눈을 뜨면 월요일이고, 눈을 뜨면 토요일이다. 달력을 확인할 때마다 인생이 퍽퍽 잘려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세월이라는 맹수가 사람의 삶을, 세월을 퍽퍽 물어뜯는다. 맹수를 피하거나 막을 도리는 없다. 불로초를 찾아 헤맸던 진시황도, 거울 앞에 앉아 이마의 주름을 잡아당겼던 측천무후도, 제 죽음을 타인에게 팔아 살고자 했던 아드메토스(에우리피데스 작, '알케스티스'에서 알케스티스의 남편)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나이를 먹지 않고, 죽지도 않는 인물이 있기는 하다. 동화 피터팬의 '피터'다. 그러나 피터는 한정된 시간에 의존한 삶의 본질인 '기억' 이나 '추억' 혹은 '아픔과 기쁨'을 얻지 못한다. 피터는 자신을 분신처럼 따라다니던 요정 팅커 벨이 사라졌을 때 기억하기는커녕 "요정은 수없이 많은 걸 뭐."라고 답했다. 기억이 없으므로 그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그만큼 '과거가 풍부해 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또 한 해를 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10대와 20대 중반 이전의 사람들은 그냥 웃었다. 그들에게 나이는 '아직 더 채워야 할 부족'처럼 보였다. 그러나 30대, 40, 50대, 60대는 나이에 의미를 부여했다.
△ 쓸쓸함 혹은 공허함
1947년 생 홍세화.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돼 프랑스 망명생활을 했으며, 프랑스 생활 중 쓴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로 국내에 알려졌다. 2002년 귀국, 현재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및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이다. 등의 저자이다. 홍세화는 자타가 공인하는 '싸움꾼'이다. 홍세화의 책과 칼럼은 그가 지치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이며,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임을 보여준다.
세모의 술자리에서 만난 홍세화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산을 내려가는 것이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들에게 삶은 미지의 무엇, 낯선 무엇일 것이다. 그러나 살아갈 날보다 남은 날이 적은 중·장년(長年)에게 삶은 익숙하고 쓸쓸한 무엇이다. 낯설고 예상치 못한 무엇과 만날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기는 하나 젊은 사람에 비해 적다."
불굴의 의지로 무장한 싸움꾼 홍세화에게도 '가는 세월'은 쓸쓸했다. 그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홍세화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싸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앞으로 그의 싸움은 '새로운 싸움을 건다.'기 보다 '지금까지의 싸움을 완성하는 쪽'인지도 모른다. 정리야말로 싸움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나이는 가족을 생각하게 만든다.
해가 바뀌면 56세가 되는 이경희씨. 그는 영업용 택시기사다. 그는 돈과 명예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고 했다. 50대 초반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50대 중반이 되면서 가치의 무게가 달라졌다. 지금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아내와 자식이다. 몇 해전까지만 해도 그는 돈을 벌기 위해 택시의 가속 페달을 밟아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가끔씩 택시를 멈추고 집에 전화를 낸다.
"문득 아내가 생각날 때, 아이들이 생각날 때 전화를 냅니다.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하고 싶어서요. 예전엔 문득문득 가족이 생각나도 돈 벌기 바빴지요. 그러다가 기분 상한 일이 있을 때는 숨김없이 표출하곤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다소 섭섭한 일은 무시하고, 따뜻한 마음만 전하고 싶습니다. 가식이 아니라 진정 그렇게 하고 싶어요. 오십 서넛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이경희씨는 '억만금도 가족의 가치와 비교할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저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변했다고 했다. 그는 "가족이 없다면 살아가야 할 특별한 이유나 의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젊은 시절 그에게 가족은 그저 하나의 부분이었는데, 중년이 된 지금 그에게 가족은 '자신의 전부'였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사진·정재호 편집위원 newj@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野, '줄탄핵'으로 이득보나…장동혁 "친야성향 변호사 일감 의심, 혈세 4.6억 사용"
尹공약 '금호강 르네상스' 국비 확보 빨간불…2029년 완공 차질 불가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