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킬' 대는 당신, 희망을 붙잡았나요?
천명관은 3년전 기상천외한 소설을 들고 나왔다. 전작 '고래'가 그랬다. 책을 읽고 있으면 입담 좋은 '뻥쟁이'가 떠들어대는 것 같다. '설마? 그럴 리가?' '너무 심하군'. 그러면서도 그 이야기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심지어는 '정말 그런가?' 쪽으로 기울기까지 한다.
그의 두 번째 책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는 11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그의 '뻥'은 여전히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 '뻥'은 뜻하지 않게 벌어지는 일들에 살을 보태어 '킬킬'거리게 하는 유쾌함을 준다. '고래'에 비해 이번 책은 조금 더 현실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국적이 분명하지 않은 글(어느 나라가 배경인 지 알 수 없고, 주인공 이름이 외국인 경우가 종종 있음)은 번역문 같기도 하고, 연극 대본 같기도, 영화 시나리오 같기도 하다.
표제작 '유쾌한 하녀 마리사'는 연극을 보는 느낌이다. 배우는 세 명 이다. 아내, 남편, 그리고 하녀 마리사. 남편은 샴페인을 마시며 아내의 편지를 읽고 있다. 편지 내용은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었으며, 그 상대가 남편의 처제, 즉 자신의 여동생이기에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자살한다는 것이다. 아내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독약이 든 샴페인을 마실 것이라고 편지에 남겼다.
남편은 아내가 있는 욕실로 당장 달려가지 않는다. 그 위급한 순간 남편이 하는 생각이란 '내가 살인범으로 몰리면 어떻게 하지? 진정제라도 먹을까? 차라리 잘 된 일이야'. 그런데 갑자기 욕실 문이 열리고 죽었어야 할 아내가 나타난다. "머리가 어지러워." 남편은 일어설 수가 없다. 이 때 하녀 마리사가 웃으며 등장한다. "냉장고에 있는 술과 바꿔놨어요." 독이 든 술은 남편에게 전해진 것이다. 하녀가 실수한 것인지, 실수한 척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반전은 제목만큼이나 유쾌하다.
이런 실수담은 '프랑스혁명사-제인 웰시의 간절한 부탁' 편에도 나온다. 몇 년에 걸쳐 공들여 작성한 토머스의 원고를 후배 존의 가정부가 불쏘시개로 써버린다. 토머스의 재능을 질투하던 존은 가정부의 실수를 나무라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인간의 간사한 질투심을 즐겁게 잡아냈다. 그래서 우리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큭큭' 하는 존이 된다. 그것이 인간이다.
'자동차 없는 인생'은 10쪽 분량이다. 미용사 엉덩이에 반해 머리 깎으러 들어간 백수 남자. 그와 미용사는 '음흉한 궁리'에 합의했으나 여자의 질문에 남자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차, 있으시죠?" 남자는 혼자 가게에서 나온다. 단지 차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자동차 소유 여부는 묻지도 않는다. '무슨 차'를 끌고 다니느냐고 묻는다. 그만큼 자동차는 '의례' '당연히' 있는 것이 돼버렸다. 다수가 소유한 것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다수에서 배제당한 우울함을 준다. 그래서 다수에 속하려고 다들 노력한다.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게 우리들이다.
남들에게 없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신중해 지자. 그것이 정말 인생을 걸 만한 재능인 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재능에 인생을 걸기로 결정 내렸다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확실하게 검증받아야 한다. '숟가락아, 구부러져라'에는 오래 전 유리겔라의 '숟가락을 구부리는 재주'를 가진 '그'가 주인공이다. 그는 '그냥 그런' 존재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그는 불행히도 혼자 있을 때만 숟가락을 구부릴 수 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회사에서, 집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자랑했다가 망신당하고 죽도록 맞았다. 결혼 한 지 15년도 후에 자신의 딸이 직장 동료의 자식임을 알게 되고 무작정 집을 나온다. 노숙자가 된 것이다. 그는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게 되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 믿는다. 다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돈도 벌고…. 그야말로 다수의 인간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재능 연마에 전력을 기울인다. 드디어 노숙자 보호시설에서 그 재능을 선보인다. 고된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눈물이 흐른다. 그 때 자원봉사자가 나타나 퉁명스럽게 말한다. "멀쩡한 숟가락을 왜 구부려요? 숟가락 구부린다고 돈이 나와요? 이 보호시설 안에 그런 사람 열 명도 넘어요."
그의 '숟가락 구부리기'는 인생에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던 '희망' 인지도 모른다. 그 희망은 동시에 집착이기도 하다.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것에 대한 집착. 불행히도 그것이 희망인지 집착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이 잡은 줄이 희망인지 집착인지는 그 끝에 가서야 알 수 있는 법. 어쨌든 힘껏 당겨보자. 그 줄이 끝나는 곳에서 유쾌하게 웃고 있는 당신이 있기를….
천명관은
1963년 경기 용인 출생. 대학 안 갔음. 스콜세지를 편애하는 시네마 키드. '총잡이' '북경반점' 시나리오 집필.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 받으며 등단. 2004년 장편 '고래'로 문학동네소설상 수상. 자칭 '가진 책이 가장 적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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