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번화가 애플사 5층 건물에 깃발 한장이 전부
대구 수성구 범어네거리 한가운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가장 먼저 옥상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한두 개가 아니라 모두 9개나 되는 대형 간판들이다. 동성로처럼 상가가 밀집한 곳이 아니라 증권, 금융 같은 빌딩이 밀집한 범어네거리에 왜 옥상 간판이 필요한가. 어지러운 간판들은 안그래도 볼 게 없는 주변 풍경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달구벌대로를 걷거나 차로 지나다니는 국내외 관광객들의 눈이 두려워지는 이유다.
◆역사를 보전하는 간판
영국 런던을 돌아다니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2층 이상 모든 건물에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100년이 넘은 백화점 거리에서도, 초고층 호텔 밀집 지역에서도, 시외로 빠지는 한적한 골목길에서도 마찬가지다.
굳이 사람들에게 묻지 않아도 런던의 거리를 걷다 보면 자연스레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런던의 건물은 요즘 지어진 것들이 드물다. 수세기의 역사를 간직한 건물들을 그때그때 보수해 사용해 왔을 뿐이다. 굳이 런던이 아니라더라도 유럽의 많은 도시들은 이 같은 건물들을 훼손하기 싫어 간판을 마구 달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런던의 건물들에는 깃발로 간판을 대신하거나 최소한의 내용만 담은 소형 간판들이 수두룩하다. 단적인 예가 영국 런던의 번화가인 리젠트 스트리트. 이곳의 '애플사(社)' 5층 건물 간판은 사과 모양을 새겨 1층 중앙에 달아 놓은 깃발 하나가 전부였다. 다른 상가 건물에서는 'eat', 'hair' 등 최소한의 내용만 담은 작은 간판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이 모든 간판들은 결국 건물이 간직한 역사와 전통의 보전하려는 런던의 선택이다.
◆도시의 경관을 보전하는 간판 규제
런던의 간판 문화와 달리 일본 내에서도 일반 시가지 간판을 가장 잘 정비한 곳으로 유명한 후쿠오카 구시가지는 대구보다 더 어지러운 간판이 도시의 얼굴을 해치고 있다. 우리처럼 보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일본에서도 무계획 간판이 판을 쳤던 것.
그러나 후쿠오카는 구시가지의 뼈아픈 경험을 신시가지에서는 반복하지 않았다. 이미 10년 전부터 4개 경관 지도 구역을 만들고, 행정의 힘으로 간판을 정비했다. 4개 지도 구역 가운데 업무지구가 밀집한 '시사이드모모치'. 30, 40층이 넘는 건물들에 수많은 업체가 입주해 있지만 모든 건물마다 1층 현관에만 간판탑을 제작해 층별로 보기 좋게 정리한 뒤 이곳 말고는 간판을 달지 못하게 하고 있다. 옥상 간판과 세로, 가로의 대형 간판을 달지 않는 것만으로도 바다와 면한 시사이드모모치의 풍경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느낌.
후쿠오카는 이곳을 비롯한 4개 경관 지도 구역의 간판 정비에 과학의 힘을 이용하고 있다. 경관 지도 구역 지정과 정비를 주도한 사토 마사루 규슈예술공과대학 교수는 "보행자의 응시 습성을 연구한 결과 수평방향에서 20° 사이, 건물로 따지면 2층 이하에서 사인물의 85%를 인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80m 뒤에서도 20~40cm의 글자 크기를 인식할 수 있었다."며 "경관 지도 구역에는 이 같은 실험 결과를 적용해 높고 큰 간판을 달지 않는다."고 말했다.
런던(영국)·후쿠오카(일본)에서 글·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후원 : 지역신문발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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