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오랫동안 흔하게 접하다 보면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건강한 생명을 연장하는 데 필수적인 물과 공기가 그러하다. 하지만 누구든 한 사발의 물을 들이켜는 동안에도, 깊은 숨을 내쉬는 동안에도 그 의미를 곰곰이 새기진 않는다.
물과 공기처럼 잠시도 떼어 놓을 수 없는 우리말 또한 마찬가지다. 송년을 맞아 개최 예정인 어느 특별행사의 홍보지를 보며 서글펐던 적이 있다. 일부 조사를 뺀 대다수의 글이 외국어 일색이었던 것이다. 엄연히 뜻이 통하는 우리글이 있음에도 굳이 외국어로 표기해야만 문장이 세련되고 세계화의 순리를 잘 따르는 것이라고 웅변하는 듯했다.
우리는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을 읽으며 모국어가 그 민족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배웠었다. 우리도 한때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겪으며 우리말과 글의 가치에 대해 뼈저리게 학습하지 않았던가.
전답이 있던 자리에 울창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지구촌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로 세대가 교체되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조기 영어교육을 선호하는 현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어린아이가 잠들기 전에 영어로 인사를 하자 부모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한 드라마를 보며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목숨을 바쳐 지키려고 애썼던 우리말이 뒷전으로 밀려난 것 같아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얼마 전 만주에 갔을 때 만난 조선족 문인들의 생활상을 보며 느꼈던 감회가 새삼 떠오른다. 이제는 남의 땅이 된 그곳에 뿌리를 내린 채 살고 있지만 우리말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감동적이었다. 우리의 말과 역사 대신 타국의 사고를 배우며 자란 젊은 세대들이 자칫 그 나라에 동화되지 않도록 한글로 쓴 시를 통해 우리 민족성과 정서를 가르치는가 하면 순수 한글문예지를 발간해 정신의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연변시인협회가 주관한 '시향만리' 창간 출판행사에 참석했을 땐 그 뜨거운 열기와 진지한 표정들에 시종 놀라기도 했다. 한결같이 조선족이라는 자부심이 묻어났고 한글을 구심점으로 얼마나 끈끈하게 결속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모국에서 함께 살고 있지 않지만 그들은 이국에 종속되지 않는 주체적 삶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백 명이 자리한 조선족 문인들 앞에서 '시향만리' 창간호에 수록된 경북 칠곡의 역사 현장을 다룬 시 '다부재 길 따라'를 직접 낭송했는데, 어느 자리 시낭송보다도 가슴 뿌듯함을 느꼈으며 적잖은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것은 우리의 것에 대한 조선족 문인들과의 일체감 때문이리라.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고 고유한 얼을 보전하고자 애쓰는 조선족 문인들의 그 아름다운 행보를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윤미전(시인·대구한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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