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창, 박규대, 하효근, 김영민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는 야구팬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들은 프로야구가 본격적으로 2군제를 도입한 1990년 고졸로 삼성에 입단한 2군 1기들이다. 프로야구 공식 2군이 출범하고 2군 경기가 시작될 시기에 선수가 부족했던 구단이 고졸 신인을 10여명씩 대거 영입했던 것. 그때 입단한 김인철이 올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었고 아직 두산에서 뛰고 있는 전상열은 2기로 입단했다. 이제 이들 1기 중에 유일하게 남은 선수가 바로 투수 이상목이다.
이상목은 경복중 야구부 3학년 시절 유격수를 맡았지만 당시 1학년이었던 최재호(전 삼성투수)에 밀려 결국 성광고로 진학하게 됐다. 키는 컸지만 힘이 부족했다고 판단한 이상목은 진학 후 악착같이 바벨 운동만 했다. 덕분에 악력이 엄청나게 좋아진 이상목은 성광고 3학년 때 투수로 전향할 수 있었고 계약금 600만 원, 연봉 600만 원에 입단한 프로에서도 자로 잰 듯한 직구 하나 만큼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2년간 군 복무의 공백 후 컴백한 1993년은 우용득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첫해. 순위 다툼이 치열했던 시즌 중반 이만수, 김성현의 부진으로 수비형 포수가 절실했던 삼성은 임시방편으로 한화 포수 박선일을 선택, 젊은 이상목을 내주고 말았다. 이상목이 그때까지 성적으로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장래성이 있어 내줘서는 안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박선일은 주전 포수로 활약,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 놓았지만 자신은 부상을 당해 한국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 결과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에 무더기 도루를 허용하며 패해 트레이드의 아쉬움은 곱절이 되고 말았다.
반면 이상목은 그때부터 타고난 제구력에 포크볼로 재무장, 승부 요령을 조금씩 터득했고 잠재된 위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4년 송진우, 정민철, 한용덕의 뒤를 받쳐주는 전천후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좋은 인상을 남긴 뒤 매년 꾸준한 상승세로 6시즌 연속 120이닝 이상을 던졌다.
1999년엔 14승8패로 자신의 최고 성적을 거두며 한화 창단 후 첫 우승의 주역이 되어 전성기를 맞이하는 듯 했지만 쉬지 않고 던진 후유증으로 2000년 오른쪽 어깨 부상을 당했다. 수술 후 1년여 동안 재활훈련에 매달린 끝에 2001년 4월 1천 이닝 투구를 돌파해 베테랑급에 오른 이상목은 2003년 대망의 15승을 거두면서 롯데와 4년간 22억 원의 FA계약을 맺는 대형선수로 거듭났다.
비록 트레이드된 팀에서 이룬 그의 성공이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삼성 공식 2군의 1기 출신이었으며 프로야구에 남은 성광고 야구부의 마지막 후예였기 때문일 게다.
부상의 후유증과 타선의 지원 등에서 궁합이 잘 맞지 않았던 롯데에서 4년간 22승의 기록을 남긴 채 이상목이 12년 만에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왔다. 금의환향은 아니지만 인생 역전을 일궈낸 그의 귀환이 반갑고 대견하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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