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중원 문화의 중심-청주

입력 2007-12-13 15:59:56

희미했던 역사가 손에 잡힐 듯

상주~청원 간 새로 난 고속도로를 따라 간 끝에 다다른 곳이 청주다. 늘 그렇듯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설렘이 앞선다.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고 어떤 사람들이 살까'하는, 약간은 떨리는 의구심은 여행이 선사하는 묘미가 아닐 수 없다. 중부 내륙의 중심에 자리한 청주로의 여행이 그러했다. 삼국시대 백제 땅이면서 신라와 고구려와의 영토경쟁 때마다 중심에 섰던 청주는 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굴된 역사의 고장.

외곽을 에두르는 미호천과 도심을 가로지르는 무심천이 흘러 사람이 살기에 좋은 지리적 이점 탓에 그 경쟁은 더욱 치열했으나, 대신 역동적인 역사만큼이나 삼국의 문화가 섞여 응축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까. 이번 청주로의 여행은 학창시절 역사교과서를 통해 스쳐갔던 시대별 흔적과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한 문화유산의 원류를 되씹어보는 계기가 됐다.

◆19개의 글자가 지닌 의미

프랑스 국립 박물관 도서관 소장품 중엔 우리나라 고려 말 때 인쇄된 불경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이 소중히 보관돼 있다. 원래 이 책은 역대 여러 부처와 조사의 게송과 법어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상하 2권으로 인쇄한 책으로 구한말 하권이 프랑스로 유출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책 하권 말미에 인쇄된 '宣光七年丁巳七月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선광7년 정사7월 청주목외흥덕사주자인시)'라는 19자가 갖는 문화사적인 의미이다. 풀어쓰면 '여말 우왕 3년(1377년)7월 충북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초본'이란 내용이며 주자(鑄字)는 금속활자를 말한다.

이 글자들을 단서로 고증을 거친 끝에 불조직지심체요절은 서양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찍었던 '42행성서'보다 73년이 앞선 금속활자본임을 입증하게 된다. 다시 말해 불조직지심체요절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가 우리나라였음을 공인받는 계기가 되면서 세계 출판역사를 다시 쓰게 한 획기적인 책이 됐다는 것이다.

그 흥덕사가 있었던 곳이 지금의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으로 현재는 절터에 전각 한 채를 지어 귀중한 문화유산을 간행했던 장소를 기리면서 그 옆에 외관이 아름다운 청주고인쇄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박물관에는 흥덕사지에서 나온 금구, 소종, 금강저, 불발(佛鉢) 등과 금속활자를 만드는 전 과정을 밀납인형으로 재현해 놓아 교육적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또 신라시대 촌락에 대한 기록문서와 조선시대 최세진의 '훈몽자회(어린이용 한자교육서)' 등 신라, 고려, 조선시대 다양한 기록문서와 티베트, 고대 그리스의 상형문자 등 인류가 지금까지 발명해 놓은 문자들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특히 금속활자본을 자세히 보면 행렬이 들쭉날쭉하고 어떤 글자는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거나 아예 거꾸로 된 것도 있다. 먹 묻음이 고르지 않아 농담(濃淡)의 차이가 심하기도 하다. 이런 현상은 목판본에서는 극히 드물지만 금속활자본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점들로 목판본과 금속본을 구별하는 열쇠이다. 불조직지심체요결 상권 글자형태가 이러했다. 때문에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당당히 등재됐다.

고인쇄박물관은 관람객이든 신청단체이든 10명이상에 한해 한지 뜨기에서 금속활자 인쇄시연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체험하는 '교과서 속 직지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문의:043)269-0556, 299-2581)

◆백제권역 최대 전사 집단의 무덤

무심천변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한 청주시 신봉동 백제고분군은 백제권 최대 무덤 밀집지역으로 300여기가 넘는 무덤과 유구가 있었던 지역이다.

백제가 지배했던 4~6세기경 신분차이에 따라 행해졌던 널무덤, 덧널무덤, 돌방무덤, 화장 등 매장풍습과 통일신라시대 이후 5경제도의 하나로 세워진 서원경문화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 있어 시대별 다양한 문화양태를 살펴볼 수 있다.

수차례 발굴을 통해 나온 토기, 장신구와 철제 칼, 창, 방어용 갑옷, 투구, 말 재갈, 등자 등은 당시 생활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삼국이 벌인 영토확장의 치열했던 경쟁을 위해 만든 수많은 철기유물들은 얼핏 봐도 이 곳이 전사 집단의 저주지였음을 알게 한다.

계란껍질이 담긴 앙증맞은 굽잔, 손잡이가 달린 잔, 세발자국무늬가 선명한 토기는 생활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손잡이 잔은 곡물을 재는 계량컵 역할을 했으며 세발자국무늬 토기는 일본에서도 출토돼 백제문화가 일본에 전해졌음을 방증한다. 섬세하게 만들어진 기마 철기류와 칼 혹은 창으로 무장한 채 재현한 기마인물상은 당당했던 백제인의 기상을 보여준다.

이 모든 유물과 자료가 청주시 신봉동 백제유물전시관에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특히 전시관에서 가까운 용두사지철당간(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소재'절 앞에 세워 괘불을 걸던 도구)은 고려 초 철당간으로서 유일하게 명문(銘文)이 양각돼 있어 국보 41호로 지정됐다. 글자 하나를 그대로 떼 내면 바로 금속활자가 될 정도로 선명한 획을 띠고 있다.

◆선사이후 중원의 역사'문화가 한 곳에

충주, 청원, 단양 일대서 발굴된 유물을 한 곳에 모아놓은 청주국립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원문화권의 살아있는 역사관이다.

백제유물관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말걸이와 장신구 등 실물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삼국의 토기문양과 중원 고구려비(모형)를 통해 청주가 그 경계지역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라가 통일 후 감시와 통제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설치한 서원경이 6부가 존재하는 행정도시의 면모를 갖췄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당시의 기록문화와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산성에 오르니 아득히 펼쳐진 산하가…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에 있는 상당산성은 둘레 약 4.1km의 포곡식(산릉을 따라 골짜기를 싸고 있는 양식)을 쌓아 원형이 잘 보존된 조선시대 대표적 산성이다. 잔설이 남아 있는 성벽 아래를 성문을 지나 성벽에 오르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볼을 스쳐간다. 상당산성이 있는 지역은 고려와 조선시대 영호남과 수도를 잇는 통로를 방어하는 요충지. 현재 모습은 임란 중 선조 29년 수축했고 숙종~영조조에 대대적으로 개축한 성곽 그대로이다.

성곽 중 가장 높은 서장대를 오르니 수려한 주변 풍광과 청주시내 전원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성내에는 전통한옥마을이 조성됐으나 볼거리보다는 먹을거리를 위해 조성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성내 관아였던 운주헌과 주변 산릉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둘러보면 마치 과거로의 발걸음을 옮겨놓은 듯 묘한 느낌이 든다. 이런 것이 산성을 불러보는 재미인 듯 싶다. 그 옛날 겨울, 수자리를 떠난 낭군을 그리던 아낙네의 따듯한 품이 북풍에라도 실려 오길 바랐던 병졸의 마음이랄까. 괜스레 더욱 바짝 성벽 가까이 기대게 된다.

'…아득히 펼쳐진 산하 의기도 드높구나. 산정마루 높이 오르니 날이 저문들 대수이랴.…'

산성아래 세워진 매월당 김시습 시비에 적인 '유산성(遊山城)'의 한 구절이 가슴에 박힌다. 청주국립박물관에서 상당산성 가는 길엔 청주랜드와 청주동물원이 있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할 수 있다.

사진'정재호 편집위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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