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지키는 용이 되어…" 문무왕 호국얼 깃들다
2년 장기 시리즈 '성지를 찾아서'가 연내 마감된다. 신라 김교각 스님이 중국에 불법을 홍포한 구화산 성지도 가보고 싶었고, 세계 첫 사찰 죽림정사(인도)의 흙을 밟으며 모름지기 '대각자(大覺者)'의 향기를 전하고도 싶었다. 병자들에게 어김없이 치유의 은총을 베푸는 루르드 성모굴의 순례객들을 소개하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음 기회'를 약속 드리며, 가까운 주변 성지로 눈을 모은다. 이번 주에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제17대 대선과 연관지어 능지사지(陵只寺址)와 감은사지를 선택하였다. 이미 감은사지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아, 감은사, 감은사여!"라는 글이 아니더라도 선한 노을에 찾아볼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이름나 있다. 신라의 수도 경주외항,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 수장된 바다무덤의 주인장 문무왕(626~681)을 기리며 우뚝 서있는 감은사지 동서탑은 살아있을 때나, 죽어서나 오직 나라와 백성의 안위만 생각한 최고 권력자의 넋이 배어있기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성지이다. 독자들에게 비교적 생소할 능지사지는 문무왕이 최고권력자로서 누릴 수 있는 사후 세계를 마다하고, 호국룡이 되기 위해 한줌 재로 돌아간 화장(火葬) 현장이다. 세월 앞에 장사는 아무도 없지만, 죽음조차 넘볼 수 없는 불멸의 넋을 지녔던 문무왕의 아름다운 혼령이 깃든 능지사지와 감은사지에서 다시 한번 정치현실을 생각해본다.
◈ 문무대왕을 화장한 능지사지
경주IC에서 내리면 금방 거리인 경주 낭산(狼山)은 경주 국립박물관 마당에서 바라보면, 경주시내로 들어가는 도로 건너 보이는 나지막한 야산이다. 낭산에는 선덕여왕릉이 있고, 사천왕사지가 있다. 경주시 배반동 621의 1번지 낭산 서쪽 기슭에 능지사지가 있는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고적이 밀집한 경주 시내나 불국사 박물관으로 바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경주와 같은 고적도시는 긴 호흡, 느린 발걸음으로 다녀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그래야 늘그막에는 꼭 와서 살고 싶은 도시, 경주의 진면목이 보인다.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장남이자, 통일신라의 기틀을 완전히 세운 문무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전쟁에 용감하게 뛰어들었고,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도 일전을 벌여 제압한 후 마침내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한반도 이남의 땅을 처음으로 완전히 통일한 군주이다. 거듭된 통일전쟁을 힘겹게 끝낸 문무왕은 질기게 가지고 있던 생명의 끈을 의외로 가볍게 놓아버렸다. 모든 성과를 아들인 신문왕에게 넘겨주고, 홀연히 이승을 떠나며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으니 화장한 후, 동해에 안장해다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언 남기다
이보다 더 숭고하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유언이 또 있을까? 진시황은 죽지 않기 위해 불사초를 구하러 사방팔방으로 사람을 보낸 것도 모자라서 수천의 병마용이 지키고 선 지하궁전을 지어서 묻혔고, 인도 무굴제국의 샤자한 황제는 죽은 아내를 위해 완벽한 대칭구조와 정교한 상감무늬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타지마할묘를 세웠다. 인류사적으로는 대단히 아름답고 거대한 건축물이지만, 당시 백성에 대한 수탈과 동원 없이는 남길 수 없는 성과물이었다. 그러나 문무왕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세상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하게 금지시켰다. 이른바 5천 년 역사의 맥을 이어온 한국적 휴머니즘의 결정체이다. "상례(喪禮)를 검약하게 하고, 죽은 지 열흘 이내에 화장하라." 백성들이 국장을 치르는 데 과다한 비용을 들이고, 서민들이 집집마다 더 세금을 갹출해야하는 현실을 막으려는 따뜻한 인간미의 발로였다. 군주가 죽었는데, 거대한 국장 좀 치른다고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문무왕은 스스로 권력의 남용을 절제하였다. 죽어서 호사보다는 마르고 닳도록 이어질 우리 역사를 생각하였다.
◈ 극락왕생보다 나라를 지키는 해룡이 되련다
불교신자로서 극락왕생하기를 거부하고, 화장한 뒤, 동해 해룡이 되기를 원했던 문무왕의 주검을 불사른 능지사지탑(경북도 기념물 제34호)을 찾아가면 누구나 감탄을 면치 못한다. "아니, 이렇게 웅대한 탑이 여기에 숨어있다니…" 규모로 보면 오히려 감은사지 3층 석탑을 능가한다. 마을에서는 예로부터 능지탑 혹은 연화탑으로 알려져왔으나 원형을 알 수 없어 현재 흙과 돌을 섞어서 지은 토석혼합 2층 구조물로 만들어놓았다. 발굴 당시 큼직한 소조불상 파편이 나왔고, 무덤 안에서 불탄 흔적이 나온데다, 문무왕릉비의 파편이 나왔고, 삼국사기의 기록까지 있어 문무왕 화장현장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12지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린 5층석탑으로 추정되지만, 원형을 알 수 없어 기단부 2단만 쌓아두었다. 기단에 새겨진 12지상 중 3개는 분실되었지만, 남아있는 9지신은 비교적 정교하고 뚜렷하다. 성덕왕릉, 경덕왕릉, 괘릉, 헌덕왕릉, 김유신 장군 묘에도 새겨진 12지상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신라인만의 독특한 생각이다.
◈ 양지무덤조차 포기하고 차갑고 어두운 바다 속으로
중국에서는 평복을 입고 앉아있는 소형 12지상을 묘 안에 묻는 풍습은 있었지만, 이렇게 기단에 새겨놓은 경우는 드물다. 12지상은 고구려나 백제묘에서 청룡(동벽) 백호(서벽) 주작(남벽) 현무(북벽)의 사신도를 그려 잡귀를 쫓고, 유택의 안녕을 바라는 벽사 사상과 같은 것이다. 능지사지탑의 화강암에 그려진 연꽃잎에는 문무왕이 믿었던 불국토 사상이 담겨있다. 이렇게 화장된 문무왕의 유골은 대왕암에 수장되었다. 양지바른 무덤자리조차 포기하고,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조성된 세계 유일의 수중왕릉이다. 바닷가에서 보면 대왕암은 그저 바위섬에 불과하다. 십여 년 전, 배를 빌려타고 대왕암에 직접 올라가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올라가 본 대왕암은 그저 바위섬이 아니라 문무대왕의 유골이 수장된 수중릉이라고 믿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정말 신기하게, 대왕암의 네 개 바위섬 안에는 십자로 난 수로가 있고, 그 수로 안에 관을 닮은 넓적한 바위돌이 놓여있다. 4개 바위가 파도를 막아주기에 바닷물이 거울처럼 맑고 고요해서 수중관돌이 훤히 보였다. 일부에서는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이다, 아니다고 논쟁을 벌이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순수하고 숭고한 정신이다.
◈ 통일 신라의 정신적 이념적 성지
서민들도 누리는 양지바른 무덤을 포기하고, 저 바다에 누워 백성과 나라의 안녕을 빌겠다는 지도자가 바로 문무왕이고, 신라국신이 된 문무왕의 넋이 깃든 곳이 바로 대왕암 성지이다. 통일 이후 신라를 이끌고 가는 이념적, 정신적 터전이 된 성지 대왕암의 해룡을 보고,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얻은 대나무로 만든 피리가 바로 만파식적이고, 만파식적은 신라제왕의 국새와도 같다. 이견대는 대왕암 바로 인근이다. 진시황이 발벗고 나서도 문무왕을 따라잡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무왕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성지는 글머리에서 밝힌 감은사지이다. 감은사지에는 동서 3층석탑이 있는데, 서3층석탑은 한창 보수 중이다. 90년대 후반, 해체 복원하던 동탑의 하늘 가설대에 올라가서 사리함이 나오는 현장을 지키고 섰다가 보도한 지가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십여 년이 흘렀다. 그 동탑에서 나온 사리함은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그와 똑같이 만든 사리함이 저 동탑 안에 들어있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생전에 짓기 시작하였으나 재임시 완공되지 못하고 그의 아들 신문왕이 완공하였다.
◈ 권력자라면 공익을 앞세워 사리추구 말아야
은혜에 감사하는 절이라는 뜻의 감은사지 금당 밑으로 동해 용왕이 드나들 수 있는 수로를 만들었다. 감은사지 금당의 석재 배치는 확실히 황룡사지나 여타 다른 사지와는 다르다. 금당 바닥에 높이 들려 올려져서 석재가 놓여있고, 그 아래에는 공간이 있다. 과거에는 금당 바닥까지 동해 바닷물이 드나들었고, 그 물을 타고 왜구를 막기 위해 죽은 문무왕이 해룡으로 화하여 드나들던 수구가 있다. 감은사지 3층 쌍석탑 가운데, 서탑은 한창 보수 중이다. 보수가 완료되면, 더 아름답고 단단한 모습으로 우리 곁을 찾아올 감은사지 둔덕에 서서 다시 한번 문무왕 같은 최고 권력자를 생각해본다. 모름지기 권력자라면 나라의 안위와 공익을 생각하여 양지바른 무덤조차 포기한 문무왕의 얼이 서린 능지사지, 대왕암, 감은사지, 이견대를 돌아보며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의 순례를 자주 해야할 일이다.
글 최미화 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 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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