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상고시대 관념에서 최고 존재는 天帝(천제)였다. 그의 아들은 天王(천왕)이었다. 천제는 하늘에 있으면서 하늘을 다스렸다. 반면 천왕은 땅으로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렸다. 천왕이 인세에 내려올 때는 산신으로 변신했다.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그랬다. 천제의 화신이 천왕이고 그 현신이 산신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천왕이나 산신은 자연스레 오랜 세월 우리 민족 최고의 신이자 수호자로 받들어졌다. 지금도 백두대간의 높은 재에는 거의 빠짐없이 산신각이 건사되고 재가 올려지고 있을 정도다. 전국의 중요한 산에 드물잖게 '천왕산'이란 이름이 붙고, 큰 봉우리에 '천왕봉'이라는 명찰이 붙은 것도 그런 의식의 결과일 터이다. 그 대표는 남한 두 번째 높은 봉우리라는 지리산 천왕봉(1,915m)이 아닐까 싶다.
그런 한편 우리 산 이름에는 '天皇(천황)'이라는 것도 드물잖게 나타난다. '천황산'은 1대 2만 5천 지도에 최소 7개나 보인다. '천황봉'은 속리산 주봉(1,058m)이자 계룡산 주봉(845m)이기도 하다. 天帝(천제)에 대척하는 듯한 天皇(천황)은 옥황상제를 가리키는 道敎(도교)의 명칭이다. 하지만 국내 옛 교세로 볼 때 그게 산 이름으로까지 올라붙게 됐을 가능성은 쉽게 공감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본래 이름이 천왕봉'천왕산인데 발음 편의성 때문에 천황으로 변전됐을 가능성이 차라리 높아 보인다.
그런 가운데 속리산 주봉 이름을 바로잡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전래 명칭은 여러 기록을 통해 천왕봉으로 확인됐다. 그걸 일제가 천황봉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천황이라는 자기네 왕의 호칭을 갖다 붙였다는 얘기이다. 산 동쪽의 尙州(상주) 지명위원회가 최근 개명을 의결했고, 산 서쪽의 報恩(보은)에서도 개명 청원이 있었다고 했다.
명칭 변질 연유야 어쨌든, 이건 잘하는 일이라 싶다. 지난 7월엔 문경시청이 80여 년이나 쓰여 온 이화령이란 재 이름을 '이우릿재'란 전래 명칭으로 되돌린 적 있다. 청송에서는 주왕산 이름을 '주방산'으로 바로잡자는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일제가 1, 2, 3으로 번호 매겨 변조한 폭포 명칭은 전래의 용추'절구'용연폭포로 회복시키자고 했다. 마침 산림청도 우리 산 바른 이름 찾기 캠페인을 벌이는 중이다. 우리 또한 각자 주위의 주요 산 이름에 관심을 가져 볼 일이다.
박종봉 논설위원 pax@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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