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빨리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길 꿈꾸던 간절함이 30년이 다돼가는 지금도 고스란히 살아나는데, 정작 다시 어려지길 소망할 수도 없는 요즘은 종종 세월을 도둑까지 맞는 기분에 당황하는 일이 잦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늘어나는 인간관계며 책임을 져야할 일들이며 미룰 수 없는 일들에 매달리다 보면, 시간은 하루 이틀씩 가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씩 이주일씩 때로는 한 달씩 두 달씩 무더기로 넘어가곤 한다. 그러다 보니 1월은 어느새 봄으로 가고, 한여름인가 했더니 가을비가 내리고, 어느 날 12월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인 수많은 월요일에도, 새로운 달의 시작인 열두 번의 1일에도 한 번도 치르지 못했던 성찰과 각오의 의식을, 12월에는 1일이 아니더라도 월요일이 아니더라도 한 달 내내 치를 수 있다는 점이다. 더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성찰과 반성이 멍석 깔아놓는 의식 없이 있는 자리에서 수시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12월은 그래서 부끄러운 달이고, 12월은 그래서 희망이 있는 달이다.
이런 12월에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한다. 누구에게나 12월의 의미는 예컨대 5월이나 8월하고는 다르련만, 개인에게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성찰의 시간들이 정치인들은 기어이 피해가는 모양이다. 어쩌면 정치영역에는 성찰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부끄러운 행태들이, 그렇게 집단적으로 만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건 기본이고, 표를 위해서는 그래서는 안 될 사람과도 동지가 되고, 눈가리고 아웅하는 일도 보고 듣기 민망할 정도다. 어떻게 해서 시행된 대통령 직선제인데,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일이 축제가 아니고 이렇게 짜증스럽고 실망스러울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단 말인가.
학교 동료들과 점심을 먹는데, 시기가 시기인 만큼 선거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아니, 식당으로 오는 내내 귀를 붙잡는 특정후보 지지자들의 특정후보를 연명하는 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짜 이번만큼 몰입이 안 되는 선거도 없다는 얘기에서부터, 돌아가는 상황들에 대한 나름의 비판들을 쏟아내는데, "제발 밥 먹는데 소화 안 되는 얘기 좀 그만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다들 그러자고 했지만 한창 열창하던 중에 반주가 끊어진 노래방에서처럼, 뭔가 아쉽고 미진한 느낌 때문에 한참을 접시를 오가는 젓가락 소리만 듣는다. 집안의 큰 잔치를 앞두고 무언가 떡도 맞추고 장도 보고 친척들에게 새사람 자랑도 하고 이런 저런 상의도 하고 싶은데 영 두 손 놓고 있는 맏며느리 심정이 이럴까.
개인의 성찰에 더해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일까지 해야하는, 어느 해보다도 몸과 마음이 바쁜 요즘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개인사를 규정하는 큰 틀이 나랏일이고 보면 나랏일과 성찰이 별개도 아니다. 어쩌면 개인사와 나랏일을 너무 분리해온 일상의 자세가, 개학 하루 전날 대충대충 해치워야 할 벼락치기 숙제가 돼버린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떨칠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결국 12월에 몰아서 하는 자기 성찰도 벼락치기 숙제에 가깝다. 살기 바쁘고 관계에 지쳐서, 1월의 초심을 까맣게 잊고 살아온 때문이다. 끊임없이 초심을 견지하는 일은 '결국 끊임없는 성찰'인 것을, 잊고 살아왔으니 성찰이 제대로 됐을 리가 없겠다.
그러나 결국 12월은 새로운 1월을 위해 있는 것, '여축없이' 자신을 드러낸 나목의 꿈이 우리의 꿈과 별반 다르지 않거늘 결국 더 큰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것. 신영복 선생은 12월의 우리에게 성찰하는 방법을 이렇게 알려준다.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켜 아기를 살펴보았습니다/ 혹시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성찰' 전문).
최경화(경북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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