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이소! 2007경북방문의 해] (46)상주.구미

입력 2007-12-11 07:03:26

경천대의 휘감아도는 낙동강 물길마다 절경 이어져

'들꽃처럼 소담스러운 친구 있다면/ 늦은 밤이라도 반가이 맞는 사람 있다면/ 언제나 차담(茶談) 나눌 사람 있다면/ 내 그런 친구 한 사람 만나고 싶다.'

구미 도리사 반야쉼터 앞 기왓장 어느 중생의 바람 글이 가슴에 젖어든다. 겨울 초입에서 홀로 길떠난 나그네에겐 억만금보다 소중한 게 이런 친구 한 사람일 게다.

저무는 한 해를 차분하게 돌이켜 볼 수 있는 고즈넉한 곳으로 떠나보자. 혼자라도 그리 심심치 않은 곳이다. 아름다운 사람이랑 함께라면 더욱 좋겠다. 속세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의 영양분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채우러 떠나자. 오랜 역사의 흔적을 찾아 수백여 년을 거슬러 긴 여행을 떠나보자. 상주 경천대에서 낙동강 1천300리 제1 절경을 눈에 담고 구미 도리사에서 천년 세월을 마음에 품어가자.

◆경천대, 휘돌아치는 물길마다 절경

낙동강 1천300리 가운데 경치가 가장 빼어난 곳으로 알려진 상주 경천대(擎天臺). 조선 인조 때 충절과 지조로 세인들로부터 숭정처사(崇禎處士)로 불렸던 우담 채득기(蔡得沂·1604~1647) 선생의 우국단충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곳이다.

경천대는 일찍이 사람의 힘이 미치지 않고 하늘이 저절로 만들어 속세와 구별됐다 해서 '자천대(自天臺)'라고도 불린단다. 이곳에 사람이 들어가 산 것은 우담 선생이 처음이라 전해온다.

선생은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청나라 심양으로 갈 때 수행했다가 돌아와 이곳에서 은둔하면서 울분을 삭이고 북벌의지를 다지다 44세의 짧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제법 바람이 매섭다. 두툼한 외투의 옷깃을 여미고 경천대를 찾았다. 들어서는 초입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임진왜란 당시 내륙전의 명장으로 알려진 정기룡 장군상이 추위에 방정맞은 길손을 엄히 꾸짖듯 포효하고 있다.

잘 다듬어진 인공폭포를 뒤로하고 잠시 걷자 왼쪽으로 전망대 오르는 길이 나온다. 333개의 계단과 수십 개의 돌탑, 양쪽으로 세워진 돌담, 70m 길이의 황토볼 맨발체험 길이 역사의 무게감을 한결 가볍게 해준다.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면서 100년, 200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경천대와 낙동강은 감탄이 절로 나게 한다. 가슴이 탁 트인다. 휘돌아 굽이치는 낙동강 물이 만들어낸 태극 문양의 중동 회상들, 강으로 불쑥 내달릴 듯 솟아오른 경천대, 절벽과 하얀 모래를 만들어 내고 있는 푸르디 푸른 강물. 이 모든 게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작품임을 실감케 한다.

전망대를 내려 영남선비들이 낙강에 배 띄우고(泛舟) 낙강에 달 띄우고(泛月) 뱃놀이하며 시를 읊었던 '낙강시회'(洛江泛月時)의 절경이 느껴지는 무우정(舞雩亭)에서 잠시 눈을 감는다. 이곳은 공자의 제자 증점이 '기우제 지내는 무우에서 바람 쐬고 놀다가 시를 읊으며 돌아오고 싶다.'라 소원한 데서 유래된 곳이다.

우담 선생도 이 무우정에 올라 절벽 아래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조용하면서도 힘찬 나라의 운명을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발길은 저절로 하늘로 솟구치는 학을 연상케 하는 천주봉과 정기룡 장군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말먹이통으로 옮겨진다.

바람이 어느새 잠잠하다. 겨울 햇살이 제법 따스하다. 수백 년을 거슬러 우국충절을 배우고 하늘이 만든 빼어난 자연의 숙연함에 경천대를 나서는 마음이 풍요롭다. 경천대를 뒤로하고 얼마 전에 문을 연 상주박물관과 충의사, 화달리 3층석탑과 사벌왕릉에서 상주의 역사를 몸으로 느낀다.

상주의 초겨울은 집집마다 곶감 익는 소리로 정겹다. 상주 내서 남장마을은 곶감마을이다. 가을 햇살과 겨울 찬바람이 감을 말랑말랑 쫄깃쫄깃한 곶감으로 만든다. 머지않아 상주곶감은 전국 소비자들의 입맛을 달콤하게 해줄 것이다. 이 마을 입구에 있는 자전거박물관도 머잖아 경천대 인근으로 옮겨진단다. 상주에는 속리산 문장대도 있다. 서설로 뒤덮인 문장대 바위로 등산객들이 빼곡히 올라간다. 하늘과 맞닿은 이곳에 서보면 세상천지가 발아래 놓여 있다.

◆도리사, 솔나무·텃밭에도 내려앉은 겨울

상주에서 대구로 향하는 25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보면 구미 해평에 천년고찰 도리사(桃李寺)가 있다. 산문을 지나 도리사로 향하는 길 옆으로 늘어선 벚나무 가로수들이 팔을 벌려 터널을 만들고 있다. 겨울 산사를 찾는 초입부터 길손에게 속계의 번뇌와 욕망을 떨쳐버리라 가르치는 듯하다.

신라 최초의 가람으로 알려진 도리사는 맹산 태조봉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도리사는 신라 눌지왕(417∼458)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하던 아도 화상은 포교를 위해 경주에 갔다 오다 냉산 동남쪽 기슭에 겨울인데도 복숭아(桃)꽃과 오얏(李)꽃이 만발해 있음을 보고 절을 짓고 그 이름을 도리사라 했다 한다.

산사를 오르는 비탈길이 제법 가파르다. 굽이길을 돌아 오르자 높게 자리한 사찰이 앞을 가로막는다. 축대 계단을 오르자 2층 높이의 설선당(說禪堂)과 보은전(報恩殿)이 눈에 가득 찬다. 고요하다. 가람 전체가 겨울잠에 빠져든 것처럼 고요하다. 백구와 황구만이 중생의 발길을 반기듯 컹컹 짖어댄다. 설선당에 그려진 화반이 멋지다. 세 송이 연꽃을 꽂아 삼보님께 공양을 올리는 듯하다.

반야쉼터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본다. 누구나 잠시 머리를 식히며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부처님 말씀과 세상의 아름다운 책들로 한쪽 벽이 빼곡하다. 어느 처사는 이곳에서 들꽃처럼 소담스럽고 언제나 반가이 차담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나고 싶다 소원했다.

가람 맨 뒤쪽에 자리한 적멸보궁 앞을 지나자 스님의 염불 소리와 목탁 소리가 비로소 이곳이 사찰임을 느끼게 해준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솔바람 소리가 제법 부산을 떤다. 산 허리를 감돌아 계곡으로 불어제치는 산바람에 나무들이 춤을 춘다. 덩달아 제 기운을 못 이겨 땅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도 다시 한번 하늘로 이리저리 비상한다.

설선당 왼쪽 양지 바른 곳에서 아도 화상을 만난다.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멀리 굽이치는 산능선을 바라보는 눈이 해탈한 부처님 모습이다. 다시 산을 내려오다 '부처님 마음처럼 흐르는 물'이라 적힌 샘에서 목을 축인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있다. 자기 밖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것은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법당 문에 적힌 법어가 가슴에 와 닿는다. 사찰을 내려오는 비탈길 옆으로 빼곡히 늘어선 솔숲으로 바람 스치는 소리가 부산하다.

구미·이홍섭기자 hslee@msnet.co.kr 상주·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정욱진기자 pencho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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