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비극속 나눈 진정한 사랑
겨울 낙동강 가에 섰다. 하얀 얼음이 강 가장자리로부터 조금씩 가운데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묶여진 책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을 다시 만났다. 대학 시절부터 줄기차게 나를 괴롭히던 내면의 상처들이 바깥으로 자꾸만 기어오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가까이에서 을 다시 만나기로 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 던져지는 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념이 사라진 이 시대에 여전히 지금도 나는 나의 진정한 광장을 찾지 못해 밀실 속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빨간 표지를 한 이라는 책은 앙증스럽게도 예쁘다. 책을 펼치면 사실 그 속에 광장이 있다. 이제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으로 들어간다.
명준은 지금 철학과 학생으로 서울에 살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대남 방송을 맡아 활동하는 인물이다. 그로 인해 명준은 경찰서에 불려가서 구타를 당하고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조사받게 된다. 그리고 형사들은 그를 빨갱이로 몰아붙인다.
이러한 과정은 명준에게 남한의 사고와 현실에 대한 환멸로 이끈다. 결국 명준은 북한을 택한다. 월북한 명준에게 주어진 것은 영웅이란 칭호였다. 하지만 명준이 만난 것은 인민이 주인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만 존재하는 잿빛 공화국이었다. 명준이 남한을 탈출한 건 그곳이 너무나 더럽고 처참한 광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한에 와서 명준이 본 것은 한 발 제겨 디딜 공간조차 없는 좁은 광장이었다. 이제 명준에겐 갈 곳이 없었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바로 은혜였다. 은혜는 명준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위문차 찾아온 국립극장 소속의 발레리나였다. 명준과 은혜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며 서로 뜨겁게 사랑을 나눈다. 은혜는 명준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한 마리 암컷이었으며, 자신의 외로움과 절망의 마지막 안식처였다. 그러다가 은혜도 당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로 떠나버린다. 그러던 중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명준은 낙동강 전선에서 간호원이 된 은혜와 극적으로 재회하게 된다. 둘은 쏟아지는 포탄과 총알 속에서 전장 너머의 작은 동굴에서 사랑을 나눈다. 은혜는 아기를 가지게 되고 딸을 낳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다시 동굴 밖으로 나간 그녀는 전사한다. 결국 명준은 국군 포로가 되고 거제도에 수용된다. 여기까지가 의 과거 이야기이다.
멀리 왜관철교가 보였다. 겨울 바람은 더욱 매섭다. 가장 참혹한 비극의 현장이라는 과거와는 어울리지 않게 겨울 낙동강은 아름답다. '빛나는 4월이 가져다 준 새 공화국에 사는 보람'을 부르짖었던 최인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불행한 시대를 아프게 살았던 지식인 이명준,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한다.'는 명준의 절박한 목소리도 겨울 바람을 따라 들려왔다. 강 너머 산등성이 뒤 이름 모를 작은 동굴에서 명준과 은혜가 나누는 사랑 이야기가 들려왔다. 분단의 비극과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내세운 작품이지만 오히려 의 진정한 주제는 오히려 '사랑' 그 자체이다.
"왜 이런 전쟁을 시작했을까요?" "고독해서 그랬겠지." "누가?" "김일성 동무지."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한참만에, 이쪽으로 돌아누우면서, 명준의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자기가 외롭다고 남을 이렇게 할 권리가 있나요?" "권리? 권리가 있어서만 움직인다면 벌써 천당이 왔을 거야." "김일성 동무는 애인이 없었던가 보지요?" "있어도 신통치 않았겠지." "이동무가 수상이라면 어떡하시겠어요?" "나? 나 같으면 이 따위 바보짓은 안 해. 전쟁 따윈 안 해. 나라면 이런 내각 명령을 내겠어. 무릇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삶을 사랑하는 의무를 진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적이며, 자본가의 개이며, 제국주의자들의 스파이다. 누구를 묻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한다. 이렇게 말이야." (최인훈, 부분)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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