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시절, 의과대 학생들에게 내분비내과학 첫 강의를 시작하면서 강조한 것이 있다. 일반적인 검사에서 이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애매모호한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 정신과적 질환으로 돌리기 전에 반드시 호르몬 이상을 의심해 보라고 강의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질환 중 대표적인 것이 뇌의 호르몬 공장인 뇌하수체에 생기는 질병들이다. 그 중 출산 뒤 심한 출혈로 뇌하수체에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호르몬 분비에 장애가 생기면 설명하기 힘든 무력감이나 혈압이 낮아지고 쉽게 쇼크에 빠지는 등 여러 가지 이상 증상들로 고생하게 된다. 이런 질환들은 일반적인 검사에서는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고 의사가 반드시 의심을 하고 병력을 물어 보고 해당하는 구체적인 호르몬 검사를 해 봐야 진단할 수 있다. 호르몬 분비 장애 환자들의 대부분에서 음부와 겨드랑이 체모가 소실되어 있다. 따라서 복잡한 호르몬 검사나 뇌 MRI 촬영 이전에 환자의 양해를 구해서 반드시 체모를 한번 확인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기본적인 진찰과 사소한 병력 확인에도 소홀하지 않도록 가르쳤다.
얼마 전 안색이 창백한 아주머니 한 분이 오랫동안 기력 저하와 속 쓰림으로 고생하고 있다면 병원에 왔다. 만성적인 위장 출혈에 의한 빈혈 증세를 의심하고 내시경 검사를 받던 중 혈압이 떨어지고 쇼크 상태에 빠졌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다행히 응급 처치 뒤 환자의 상태는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당시 무척 당황스러웠다.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왠지 환자의 표정이 어둔하고 행동도 느려 쇼크를 일으킬 만한 숨겨진 원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몇 가지 검사를 권유했다. 하지만 보호자는 같이 살면서 하루도 안 아픈 날이 없어 여러 병원 다니면서 웬만한 검사는 다 해 봤지만 결국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들었다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정신과에나 가 보려고 하니 더 이상의 검사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일단 경과를 지켜보기로 하고 환자를 돌려보냈다.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정신과 진료에도 불구하고 기력이 좋아지지 않는다며 영양제를 맞고 싶다며 다시 찾아 왔다. 다시 한 번 환자의 상태를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보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속옷을 벗게 하고 진찰해보니 음부와 겨드랑이 부위 체모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 막내 출산 뒤 하혈을 심하게 했던 병력을 알게됐다. 확인을 위해 호르몬 검사를 했고 출산 뒤 출혈에 의한 뇌하수체 기능 저하증으로 진단할 수 있었다.
환자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고생했던 병의 원인을 찾게 됐고, 간단한 호르몬 처방으로 건강한 삶을 찾게 되어 너무나 고맙다고 연방 감사를 했다. 하지만 내시경 검사 전에 환자의 병력이나 진찰에 좀 더 신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의과대학을 다니던 시절, 환자의 상태를 눈으로 살피고, 손으로 만지거나 두드려 보는 것들이 진료의 기본이자 진단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배운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요즘은 간단한 방사선 검사나 초음파 등으로 쉽고 더 정확하게 환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청진기조차 갖다 대 볼 필요성이 없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의학은 조금만 나태해 지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최첨단 장비나 검사들이 새롭게 개발돼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최첨단 장비들도 의사의 신중한 기본적인 진찰보다 우선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윤현대(라파엘내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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