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브(stove)는 히터(heater)와 같은 의미의 단어다. 스토브리그란 원래 비시즌 기간인 겨울에 구단의 단장들이 난롯가에 모여 앉아 트레이드를 논의한다고 해서 생겨난 말. 더러는 난롯가에서 구단과 선수가 연봉협상을 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지만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겨울이어서 포괄적인 뜻으로 쓰게 된 것 뿐이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연봉협상은 결코 다정스러울 수가 없어서 난로가 없더라도 열기는 자연스럽게 넘쳐나게 되어 있다.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 협상은 길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구단 관계자나 선수 모두 협상 매너 자체가 세련되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연봉 책정 방식이 서로 신뢰할 근거를 갖추지 못해 각자의 주장만 되풀이, 협상 분위기도 자연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협상액 자체가 낮았기 때문에 타협이 힘들었다. 1980년대에는 입단하면 첫 연봉이 대개 1천200만 원. 게다가 연봉 상한제(25%)가 있어 전 경기를 출장해 가장 잘해야 300만 원이 인상됐다. 그러니 대부분의 선수가 밀고 당기는 금액의 폭은 50만 원이나 100만 원이 고작.
구단 살림이 넉넉했으면 주는 쪽도 시원시원하게 주고 받는 쪽도 다음에 더 받으면 되니까 양보도 쉽게 했겠지만 당시는 선 재가 후 협상제로 운영돼 구단이 그룹으로부터 재가를 받아 확보한 연봉의 총액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한 사람이 많이 가져가면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은 양보를 해야만 하는 구조. 매년 타협의 장기화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삼성은 창단 후 10년 동안 5번의 준우승을 했는데 이때가 연봉 협상이 가장 힘든 시기였다. 준우승을 하면 연봉 총액의 상승폭은 전년 대비 15% 정도인데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한 선수의 공헌도나 다음 연도의 기대치는 이보다 높은 것이어서 이때마다 진통을 겪었다.
결국 이만수나 장효조, 김시진처럼 해마다 공헌도가 가장 높은 선수가 되어야만 몇 년 뒤 2천만 원이 넘었을 뿐 대부분의 선수는 5, 6년이 되어도 2천만 원을 넘질 못했다. 오히려 연봉이 조금 인상되었다고 주위의 지인들에게 인심쓰고 술 한잔 사면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1983년 입단해 프로야구 2000호 홈런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던 홍승규(현 대구MBC 야구해설위원)는 자신의 의견이 분명하고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 1990년 연봉 협상테이블에서 구단의 감액 제시를 받자 8년 경력의 프로선수로서 자신의 가치가 1천500만 원도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옷을 벗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그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구단이 버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옷을 벗은 프로 첫 임의탈퇴 은퇴선수가 됐지만 홍승규는 그 소신을 바탕으로 사업가로 변신해 성공했다.
세상이 변하고 선수협의회 파동 등의 여파로 1993년에 이르러 프로 입단 첫 연봉도 2천만 원으로 바뀌었고 연봉상한제도 철폐되면서 연봉의 무한 상승시대가 열리게 됐다. 돈의 가치가 지금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선배들의 고통이 점철된 과거가 없었다면 지금의 화려한 시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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