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센타'가 성업중이다. 타인의 은밀한 사생활을 탐색하는 역할을 넘어 '대역 인간'을 임대하기도 한단다. '엑스트라'라고 불리는 대역 배우들이 이제 영화나 드라마 판에만 필요한 게 아닌 모양이다. '학부모'를 빌려서 자녀의 학교에 보내고, 부모에게 선보일 몇 시간 짜리 '애인'도 빌릴 수 있다. 심지어 결혼식에 손잡아 줄 신부의 '아버지'도 빌릴 수 있다고 한다.
사람 사이의 그 어떠한 '관계'도 급조할 수 있고, 그리하여 부실한 삶의 한 순간을 완벽하게 연출할 수 있다. 물론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이 소설은 '피귀렉'이라는 인간파견회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거짓 인생'들을 그럴 듯하게 다루고 있다.
피귀렉을 이용하는 사람이나 거기에서 파견되는 대역 인간들은 철저히 비밀에 가려져 있다.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배우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감독관의 수 또한 엄청나다. 그들은 피귀렉이 잘 돌아가기 위한 것이라면, 즉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개인들은 물론 대기업도 비밀리에 피귀렉을 고용한다.
피귀렉의 수요는 무궁무진하다. 결혼식 하례객은 물론 썰렁한 장례식을 위해서도 그들을 고용할 수 있다. 자식들 앞에서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은 부모는 유명 인사를 저녁식사에 초대할 수 있고, 이웃들 앞에서 우쭐거리고 싶다면 거지를 고용하여 얼마씩 적선하는 장면을 연출하면 된다. 또한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에 손님들로 북적이게 할 수도 있다. 피귀렉은 어디에나 넘쳐난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담뱃불을 빌리는 피귀렉도 있다. 그는 불을 빌리면서 자신의 담배를 슬쩍 보여준다. 담배회사에서 고용한 피귀렉이다.
주인공은 희곡을 쓰고 있는 젊은 독신남이다. 하지만 그가 쓰는 희곡은 1막 1장 이상 나아간 적 없다. 똑똑한 동생에 비해 무능하고 비사교적인 그는 친구조차 없다. 그러던 그가 벼룩시장에서 쥘리앵이라는 사람을 만나 금방 친해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의 장례식에 갔다가 한 피귀렉 조직원을 알게 된 그는 매력적인 여자 친구 '타니아'를 고용해 부모와 동생 앞에 데려간다.
완벽한 대역 배우 덕분에 부모에게 인정받고 생의 활기를 되찾은 그는 점점 더 타니아에게 빠져든다.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는 '피귀렉 증후군'이다. 지불해야 할 돈이 연체되어 타니아와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그는 서서히 파멸한다. 알고 보니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 쥘리앵 부부 역시 피귀렉이란 걸 알게 된다. 세상과 단절되어 늘 혼자인 아들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그의 부모가 고용했던 것.
주체적 관계마저도 자율적으로 완성하지 못하는 플라스틱 인간들. 하긴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삶의 수동성에 길들어버린 현대인의 보편적인 초상이 아닐지. 풍요로운 물적 토대가 이상적인 '관계'를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고 혈연이나 학연이 사람 사이의 진정한 '소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같은 매개에 매달려보지만 그것 또한 완벽한 '끈'이 되지 못한다. 소통불능에 빠진 불안하고 공허한 사회. 그래서 관계를 조작하고 타인의 관심이나 온기마저도 돈으로 사려는 사람들. 분명 사회 병리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정말이지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bipasor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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