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7년, 2002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이번 대선 역시 '잔인한 11월'을 맞아 돌발 변수 후보가 등장했다.
말이 '돌발'이지 사실 앞서 대선에서나 이번 대선에서나 짐작하고 예견했던 변수들이기는 하다. 특히 '정치를 떠난다'고 했다가 '국민의 염원'을 차마 져버릴 수 없었다며 다시 대권에 도전해 결국 성공한 사례가 있다보니 '돌발'이니 '변수'니 하는 말도 어찌보면 결국 정치의 속성을 모르고(아니면 순진한 생각에서) 붙여보는 조악한 수식어가 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일단 이번 대선에서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출마를 선언하면서 최대 돌발변수가 됐다. 대통령 선가를 한달여 앞두고 등장한 이회창은 대선에 주사위를 던졌다. 여 야후보를 모두 뒤흔들고있고 한달여 앞둔 선거는 종잡기 힘든 상황이 되어가고있다.
경기가 됐건 선거가 됐던 막판 뒤집기는 짜릿하다. 물론 패자에게는 허탈하다. 그런 뒤집기를 가능케 한 이면에는 돌발 후보가 있게 마련이다. 지난 1997년 대선에서는 이인제 후보가 이런 역할을 했다. 당시 이 후보는 이회창 전 총재와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맞붙었다. 이 후보가 이 전 총재에게 진 뒤 탈당하면서 평범했던 정치 드라마는 급반전을 시작한다. 당시 대선에서 이 전 총재는 993만 표(38.7%), 국민신당 후보로 출마한 이 후보는 490만 표(19.2%)를 획득했다. 보수진영의 표가 분열되면서 대권은 김대중 후보에게 넘어갔다. 경선에 출마 후 패배한 정당 후보의 독자 출마를 금지한 이른바 '이인제 법'이 만들어지게 된다.
결국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 됐지만 2002년 대선에서는 외양간만 고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다시 보여줬다.
5년 전인 2002년 11월. 당시 대선은 대세론에 힘입은 이회창 후보를 노무현 후보, 정몽준 후보가 힘들게 추격하고 있었다. 이 후보를 향한 '병역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서 대세론이 흔들렸고, 특히 11월 6일은 이 후보의 부인 한인옥씨가 기양건설로부터 거액을 받았다는 보도까지 터져나왔다. 하지만 의혹에 불과한 상태여서 이 후보의 입지가 의심스런 단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표와 국민승리21의 정몽준 후보간의 극적인 단일화가 이뤄지면서 선거는 흥미진진해졌다. 막판 역전이냐 아니냐가 흥미진진한 뉴스거리였다. 그래도 이 후보의 승리를 점치는 쪽이 우세했다. 하지만 정몽준 후보는 마지막까지 극적 반전의 주인공임을 입증했다. 대선 하루 전 정 후보는 단일화 공조 파기를 선언하고 칩거에 들어갔고, 노 후보는 밤 늦게 정 후보의 자택을 찾아가 문전박대까지 당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57만 표 차이로 이 후보를 누르고 대권을 잡게 됐다. 공조 파기가 없었더라면 어떠했을 지 자못 궁금하다.
이번 대선에서는 이회창 전 총재가 돌발 변수로 등장했다.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대권을 두 번이나 놓친 이 전 총재의 출마 선언은 어찌보면 '돌발'이 아닌 '수순'으로 봐야할 지 모른다. 돌발이건 수순이건 문제는 과연 이 전 총재의 출마가 대선 판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변수가 될 수 있느냐는 것. 오히려 이번 대선의 진정한 변수는 박근혜 전 대표일지도 모른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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