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안전보호조치 외면…한·일 정부 사실상 정치결탁
이 글을 써나가고 있는 중에 두 가지 변수가 생겼다.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한 납치사건의 피해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 방문 중 지난번 국정원 진실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불만을 표시함과 동시에 일본정부의 처사에도 강력한 항의를 표시한 것이다.
또 하나는, 한국의 유명환 주일대사가 이 납치사건으로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데 대하여 일본 외무장관에게 '유감'을 표명한 것이다. 일본 언론은 이를 '사실상 사죄'라고 했다. 마침 일본 현지에서 이런 보도를 접하게 된 나는 쓰던 글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 쓸 수밖에 없게 됐다.
국정원의 진실규명위원회가 지난달 24일 공표한 '김대중납치사건 조사결과'는 지금까지 34년 동안이나 은폐되어 왔던 권력범죄를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그만큼이라도 밝혀냈다는 점에서 대견스러운 일이었다. 그 조사보고는 의혹의 두 가지 핵심에 관해서 결론을 내려놓았다.
첫째, 범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 둘째, 단순 납치가 아닌 살해 목적을 가진 범행이었다는 점 등이다. 문장 상으로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는 '묵시적 승인' 등 우회적인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사건 조사의 제약과 고충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박 대통령의 지시 여부 및 살해 목적의 유무가 국내적 관심사인데 반해서 범죄 발생지인 일본의 입장에서는 영토주권의 침해 문제가 주된 관심사가 되어왔다. 이번 진실규명위원회의 발표가 나온 뒤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고 나서는가 하면, 새삼스럽게 무슨 수사라도 할 듯 한 제스처까지 보였다.
지난 34년 동안 한·일 두 나라의 시민단체와 언론 등 각계에서 사건의 진상 및 책임의 규명을 그처럼 줄기차게 요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이동풍 격으로 이를 묵살해온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의 진상조사 발표가 나오자 마치 모르고 있던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듯이 피해자 '사정청취'와 한국정부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사실인 즉 일본 당국은 1973년 8월 이 사건 발생 당시 피해자 신변의 위험을 사전에 간파하고도 응분의 안전보호조치를 하지 않았으며, 범죄 발생 후 육로와 해상의 경비 검문을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범인들의 도주 및 납치를 가능케 하였다.
당시 피해자는 일본에 적법하게 입국하여 체류 중이었다. 더구나 그는 한국의 최고 정치지도자로서 박 정권의 탄압대상이 된 인물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일본정부는 그의 신변의 안전을 비롯한 기본인권을 지켜 줄 법적인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그에 대한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일본 측은 범죄 발생지 관할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초동단계부터 적극적인 수사를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밝혀낸 사실마저 공개하지 않고 은폐하였다. 또한 일본정부는 자국의 국내법상 이 사건 범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수사를 하려는 아무런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30여 년을 허송해왔다.
1973년 11월 김종필 국무총리가 박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에 건너가 다나카 총리와 일본 국민에게 진사하였으며, 그 후 또 한번의 '정치결착'을 함으로써 두 정부는 이 사건을 더 이상 거론치 않기로 합의하였다(그때를 전후하여 다나카 총리에 대한 금전 제공설까지 나돌았다).
한국정부에 대한 사과 요구는 기본적으로 두 나라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다. 다만 그 엄청난 범죄를 방임했거나 자기 영토 내에서 검거하지 못하고, 박정희 정권과 검은 유착을 하여 성급하게 수사도 중단한 일본 당국이 그러한 자기 과오는 접어두고 한국정부에 대해서 떳떳하게 사과를 요구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설령 한국정부에 사과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사건 발생 후 한국의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친서를 전하며 일본 수상에게 사과한 이상 일본정부가 또다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찌 되었건 우리 정부는 일본 측에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 글 첫머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일본정부의 여러 과오를 생각한다면 일본정부 또한 피해자와 한국 국민에게 사과해야 마땅하다. 지난날 두 번에 걸친 한·일간의 소위 '정치결착'은 어디까지나 정부끼리만 서로 눈감아주기로 한 것이고, 피해자와 한국 국민에 대한 두 나라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정부의 사과의무는 엄연히 남아 있는 것이다.
한승헌(변호사·전 감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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