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에 버림받고 밀려나는게 어디 허수아비 너뿐이겠느냐
누렇게 익어 가는 들판을 걷고 있다. 코스모스는 환하게 웃고 새들은 노래 부르며 반긴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은 느릿느릿 흘러가고 바람은 산들산들 다가온다. 맑은 물에 발을 담가 본다. 살갗에 배어드는 향긋한 차가움. 이 느긋함과 충만함,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저만치 서 있는 허수아비가 아는 체하며 손짓한다. 그런데 가을들녘의 불청객을 쫓기 위해 선 허수아비의 모습이 가관이다. 굵은 눈썹에 툭 튀어나온 눈망울, 우뚝한 콧날에 쭉 찢어진 입, 거기다 벙거지까지 갖추어 쓰고 제법 위세를 부리려 들지만 모든 게 제각각이다. 우스꽝스럽다.
더러는 저런 모습으로 어떻게 영악한 침입자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 싶어 미심쩍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기다란 줄을 논둑 사방으로 드리워서 깡통을 달아 주고, 오색 천을 얼기설기 엮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 과수원에서는 그물까지 쳐주면서 잘 지키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예전같이 제 구실을 못한다며 반신반의한다. 궁리 끝에 새로운 장비를 갖춰주기에 이르렀다. 뱀이나 올빼미 같은 포식자의 울음소리, 시끄러운 곤충소리, 꽹과리소리, 총소리, 사이렌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허수아비는 가을 들판의 충실한 지킴이다. 비바람을 견디어 내고, 잠을 자거나 졸지도 않으며, 심심하다고 자리를 비우지도 않는다. 이따금 참새며 까치들이 찾아와서 아는 체하거나 애교를 부리며 유혹을 해도 넘어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계절의 정취며 그리움이며 슬픔마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낮에는 이삭들과 두런두런 허튼소리를 나누고, 밤에는 별들과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그뿐이랴. 들판에 황금 물결이 일렁이면 찾아오는 님이 있다. 하지만 멀리서 찾아온 님을 '훠이~훠이' 하고 손사래치며 돌려보내야 하는 슬픈 운명을 타고났다.
옛사람들은 삶의 여유와 멋을 소중하게 여겼다. 크고 작은 일에 대해 그렇게 인색하거나 매몰차지 않았다. 설령 집안에 도둑이 들어도 모르는 척 눈감아 주거나 그냥 쫓아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때로는 딱한 처지를 이해하고 양식이며 돈냥을 손에 쥐어 주면서 토닥거려 주기도 했다.
들판을 지키는 허수아비도 그 같은 여유와 잔정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풍속이라 할 수 있다. 지키는 사람 열이 도둑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는 옛말이 있다. 더구나 날이 갈수록 영악해지는 참새며 까치며 까마귀들을 당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가 하면 시대가 바뀌고 주인들도 많이 바뀌었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 감각에 걸맞은 새로운 방식을 부르짖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허수아비는 한낱 거추장스러운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다행히 인정 많은 주인을 만나 붉은 제복을 갖춰 입고 왕궁을 지키는 의장병처럼 의젓한 모습으로 가을 들판을 지키는 행운을 누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요행을 아무나 바랄 수는 없다.
허수아비도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그 모습이 예전 같지 않다. 어깨는 축 처지고 표정은 일그러졌다.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이다. 개밥에 도토리처럼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언제 쫓겨날지 몰라 불안하단다. 더러는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더러는 거추장스럽다고 몰아세운다나…. 후줄근한 모습이 안쓰럽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서럽고 불안하다. 허수아비는 힘이나 재주가 부족할 뿐더러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도 없다. 그렇다고 고집이나 주장 같은 것도 있을 리 없다. 설령 오늘의 서러움을 참고 견딘다고 해도 다른 기회가 주어질 성싶지도 않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오래된 것, 소중한 것, 아름다운 것들을 잃게 된다. 그래서 삶을 따스하고 기쁘게 해주는 여유·웃음·멋 같은 것들이 뒷전으로 밀려나 사람살이가 거칠어지고 고단해진다. 하기야 뉘라서 거센 변화의 물결을 거스를 수 있을까. "허수아비야, 허수아비야, 버림받고 밀려나는 것이 어디 너뿐이겠느냐?"
김종욱(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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