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단상] 고소한 김칫국

입력 2007-10-25 16:53:21

살포시 미소 베어 문 소녀가 다가옵니다. 수줍음에 얼굴은 홍조로 가득합니다. 삼단같이 치렁치렁한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조심스레 한 마디를 꺼냅니다. "오늘밤 시간 있어요?"

낯선 인도 땅을 헤매고 다닌 지 몇 주가 지났습니다. 선교단의 일정에 맞춰 매일 이 마을 저 마을을 돌며 공연을 하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카메라기사 역할을 담당한 나는 다른 멤버들이 공연을 하는 동안 늘 청중과 함께 합니다. 드디어 복(?)이 터진 것입니다.

"We?" "No, Only You!" 오픈행사에서 선보였던 사물놀이가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징을 치던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합니다. 집 떠난 지 한참이 지난 시기, 박한 음식에 불편한 잠자리, 구수한 된장과 정이 몹시도 그리울 무렵입니다. 선택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은근하고 은밀한 기쁨에 가슴 벅차옵니다.

"대장님, 저녁에 잠깐 외출 다녀오겠습니다." "안 된다, 위험하다" 시어머니 여대장님의 훈계와 나의 고집이 설왕설래 하는 사이에 그녀가 저를 맞으러 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집이 바로 근처예요" 소녀를 일견한 여대장님, 비로소 사태가 진실임을 감지합니다. "조심하고, 일찍 돌아와라~"

한국이나 인도나 시골마을의 어둠은 더 진한 모양입니다. 그녀가 손을 내밉니다. 길을 잃으면 큰일입니다. 마을길까지 울퉁불퉁합니다. 땀이 날 정도로 손을 꽉 쥡니다. 인도는 참 어려운 것입니다.

작은 불빛이 비치는 집 앞에 당도합니다. 어둠속 짐작으로는 제법 규모가 큽니다. 다른 식구들은 모두 잠이 들었는지 온 집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합니다. 현관문을 조용히 연 그녀, 거실을 지나 곧바로 그녀의 방으로 인도합니다. 작고 아담한 방입니다. 책상하나와 침대하나가 전부였지만 공간은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가득 합니다.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소개합니다. 누가 언제 생일 선물로 준 것이라는 둥, 우연히 길을 가다 산 것이라는 둥... 안타깝게도 설명만 계속됩니다. 한참을 그러던 그녀, 책꽂이에서 사진첩 한권을 꺼냅니다. 제법 두껍습니다. 또 다시 한 장씩 넘겨가며 등장인물을 소개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형제자매... 수 십 명에 이릅니다.

밤은 깊어 가고 할 일은 남았는데 그녀의 이야기는 끝이 나질 않습니다. 조바심이 안달로 바뀌는 순간, "차 한 잔 어때요?" "OK!"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말잔치를 끝내야 할 시점입니다.

잠시 후 차 준비되었다는 신호에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갑니다. 화려한 제2막? 아~! 기대가 절망으로 곤두박질칩니다. 불 켜진 거실에는 전 가족이 깨어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환영합니다." 현실인식, 포기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오랫동안 정담을 나눕니다. 노래도 부릅니다. 새삼 노래가 인류공통언어임을 느낍니다. 자꾸만 내 양쪽 뺨이 빨갛게 물들어 갑니다. 부끄러움이 아니라 인도식구들의 따뜻함 때문입니다.

이정태(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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