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에는 정조를 따르는 주인공 이인몽이 왕명을 받들어 연암 박지원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정통 성리학을 숭배하는 인몽은 박지원의 자유로운 글쓰기가 성리학을 어지럽히는 이단이라며 왕 앞에 사죄할 것을 요구하지만 연암은 오히려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 사람은 그저 묵묵히 제 소신대로 사는 것이오. 내 피가 뛰는 가슴으로 느끼고 내 머리로 생각한 것이 그렇거늘,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답답한 전통에 얽매인 젊은 선비와 늙은 학자의 대화를 읽으면서 둘의 나이가 바뀐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암의 생각은 유연하고 시원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강욱 대구교대 교수가 펴낸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의 생각수업'(스콜라 펴냄)은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연암 박지원 읽기다. 양반전, 열하일기 등으로 유명한 박지원은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과 해학이 담긴 글쓰기로 시대를 앞서간 인물. 아빠가 딸에게 쓴 편지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책은 연암의 지혜를 쉽고 친근하게 설명하고 있다. 생각수업이라는 제목답게 모두 11개 수업(장)을 통해 생각하는 훈련을 주문하고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뒤집어 생각하는 법'을 보자. 저자는 연암이 중국을 다녀와 쓴 열하일기 '수레의 법식'이라는 글을 인용하고 있다. 당시 조선에는 수레가 보편화되지 못했다. 연암은 수레를 신기한 물건쯤으로 여기는데 그치지 않고 수레와 가난의 문제를 연관지어 생각했다. '수레를 이용하면 사람과 물건을 편하게 실어 나를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지역 간의 교역이 활발해져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당시 사대부들은 조선은 산이 많아 수레가 다니기 힘들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암의 생각은 달랐다. 길이 험해서 수레를 못 쓰는 게 아니라 안 쓰니까 길이 안 닦인다고 답답해 한다. 뒤집어 생각하기는 이처럼 모두가 당연히 여기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데서 출발한다.
'양반전'은 권리와 의무의 관계를 얘기하고 있다. 공부에 전념하느라 가족을 부양하는 데는 도통 무관심한 가난한 선비, 자리를 이용해 양반자리까지 팔며 권세를 누리지만 도덕적인 의무에는 소홀한 군수. 어느 쪽도 진짜 양반은 아니다. 권리를 누림과 동시에 의무를 다해야 비로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추기 때문이다.
'예덕선생전'은 선귤자라는 당대 최고 학자와 똥 푸는 일을 하는 엄행수라는 인물의 우정을 통해 참된 친구란 세력이나 이익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서로 믿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맺어지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어딜 가나 창의적 사고력을 부르짖고 있는 요즘이지만 정작 아이들의 사고는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아무리 유명한 학원, 족집게 과외강사를 찾아가도 생각의 틀을 만들어주는 곳은 없다. 이런 가치는 우리 내면에서 자연스레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훌륭한 도구가 바로 책이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생각해 보기
1. 허생전에서 허생은 변 부자로부터 빌린 만 냥으로 큰 돈을 벌지만 어려운 사람과 도적을 구제하고 난 뒤 자신은 다시 가난한 선비로 돌아온다. 허생이 이렇게 한 이유는 뭘까.
2. 연암 박지원은 양반전, 열하일기 등으로 시대를 앞선 통찰력을 지닌 학자로 후대에 와서 평가받고 있지만, 당대에는 문단의 이단아로 취급받았다. 당시에는 왜 이런 평가를 받았을까.
3. 박지원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를 키워낸 대표적인 사상가다. 실학 사상이 태어난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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