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옥입니다] 묵은지

입력 2007-10-17 07:39:51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는 '칼바도스'라는 이름의 사과술이 자주 등장한다. 유능한 독일인 외과의사로 나치를 피해 파리로 온 라빅크는 약혼녀를 죽인 나치에 대한 복수심, 우연히 만난 여인 조앙 마두에 대한 사랑, 망명생활의 불안함 속에서 부초 같은 삶을 이어간다. 외로운 두 연인은 함께 자주 칼바도스(사과술)를 마신다. 언젠가 파리에 가면 시니컬한 얼굴의 라빅크가 칼바도스를 마셨던 조르쥬 5세가의 노천 카페에 앉아 보리라, 칼바도스를 마시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수년 전, 마침 한 지인이 프랑스에서 칼바도스 1병을 사가지고 왔다. 파리의 주류 가게를 뒤져 찾아냈다는데 한 60, 70년 된 술로 기억한다. 가게 주인은 색다른 술을 찾는 그를 동양의 왕족쯤으로 여기는 것 같더라고 했다.

몇 명이 칼바도스를 맛볼 행운을 누렸다. 술맛을 운운할 실력과는 거리가 멀지만 첫 한 모금이 혀에 닿았을 때 입안 가득 화악, 번져가던 그 짜릿한 향기로움이라니…. 원래는 신사숙녀들이 마실 만한 술이 아닌, 하급술로 알려져 있지만 수십 년이라는 세월 속에 그토록 향기로운 술로 익어갈 수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 어딜 가나 와인 열풍이다. 곳곳에서 와인 전문 강좌가 열리고, 와인 클럽들이 속속 탄생하고, 애호가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와인은 단골 화젯거리다. '빈티지'니 '샤토'니'디켄팅'이니 낯선 와인 용어를 모르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에 외계인이 따로 없다. 오죽하면 '와인 스트레스'라는 말이 나올까.

전문가들은 좋은 와인의 특징으로 풍부하고(rich), 부드럽고(round), 깊이 있는(deep) 맛을 꼽는다. 오래된 와인일수록 이 세 가지 미덕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새것을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 성싶다. 그런데 유독 먹는 것만은 묵은 것도 좋아한다. 젓갈, 장아찌, 고추장, 된장…. 이 몇 년 새 부쩍 우리 혀를 유혹하는 것 중 하나도 '묵은지'다. 배추김치를 짐짓 2, 3년씩 묵혔다가 찜·만두·쌈 등에 이용하는 묵은지 음식들이 도시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햇김치가 결코 낼 수 없는 깊은 맛, 어우러진 맛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니 세월 갈수록 깊은 정 우러나는 묵은지 같은 사람들을 점점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다.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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