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책 읽기] '부인' 열전

입력 2007-10-11 16:39:55

흔히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가을이라 싱숭생숭한데 '가을 타는 남편'까지 둔 여인의 마음은 어떨까요? 책 제목에 '부인'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 가운데 다섯 권을 골랐습니다. 한 권의 산문과 네 권의 소설입니다. 강은교 시인의 산문선집 '어느 불면의 백작 부인을 위하여'가 그 첫 번째 입니다. 소설 속 부인들을 만나기에 앞서 현실 속 여인을 먼저 만났습니다. 강은교 시인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의 주인공입니다.

임신부가 뇌출혈로 쓰러집니다. 나이 스물일곱. 임신 6개월째입니다. 수술을 위해 임신부는 머리를 깎습니다. 수술은 완벽하게 끝납니다. 뱃속의 아이는 질긴 생명력을 보입니다. 몸의 왼쪽이 마비됩니다. 그래도 희망이 보입니다. 그런데 다시 출혈. 이제 절망이 보이려합니다. 임신 7개월 반의 여인은 제왕절개를 합니다. 쌍둥이. 두 생명이 태어났을 때 산다는 일은 의무가 됩니다. 두 번째 수술 후 반신마비의 몸으로 퇴원합니다. 이후, 한 아이를 묻습니다. 아이의 나이는 7개월입니다. 여인의 목숨은 현실과 이어집니다. 그 여인은 시인 강은교 입니다. '허무의 시인' 강은교는 그렇게 두 번째 삶을 시작합니다. 현재 시인은 동아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시인은 1968년에 등단했습니다. 지금까지 시를 씁니다. 반신불수의 몸이 어떤 과정을 거쳐 회복됐는지 모릅니다. 시인이 교수가 되기까지 어떤 힘겨움 삶이 있었는지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간간이 읽은 시에서 변화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허무에서 출발하여 자연과 생명, 인간의 관계에 대한 관심으로 시인은 마음의 자리를 옮겨가고 있는 듯 합니다. 산문선집 '어느 불면의…'는 그런 시인을 담았습니다. 그간 시인이 펴낸 산문집 중 22편의 글을 후배 시인 손택수가 가려뽑았습니다.

강인교 산문선집의 표제작인 '어느 불면의…'는 예술의 의미에 대해 말합니다. '어느 불면의 백작 부인을 위하여'라는 글귀는 바흐가 작곡한 노래판 껍질에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각, 그 불면의 백작 부인은 사라지고 21세기의 '부인 강은교'가 바흐의 곡을 듣습니다. 시인은 '한끼의 식사를 위하여, 뜻 없는 칭찬과 감사를 위하여, 그리하여 밤이면 영 잠 못 드는, 부(富)하나 괴로움 많은 한 여인의 꿈을 부르기 위하여 밤새도록 음의 영계를 헤맸을 예술가'를 상상합니다. 예술가에게는 '그 누구'가 필요합니다. 곡을 바칠 그 누군가가. 예술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그 누구' 때문에 살아가는 지도 모릅니다. '그 누구'는, 죽음이든 신이든 혹은 바로 자신이든.

그러나 시인에게 '그 누구'는 없습니다. '필요하다, 그 누군가가. 아니 환상이, 깨어지지 않는 소리와 고독과 하찮은 고통이 필요하다. 하찮은 고통, 잊힘과 멸시와 작은 상처들과 먹음에의 고통…이 필요하다. 거기서 한마디는 태어나는 것이다. 저 노래의 시대에서처럼 구체적인 증거의 한마디가.' 시인은 무수한 상처들 속에서도 '그 누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흐의 곡은 이제 '어느 한 백작 부인이 아니라 '그이'로 집합되는 무수한 시대의, 무수한 불면의 고통스러운 존재를 위하여' 자기의 목소리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아둔한 백작 부인'이 사라진 지금.

책에는 시인의 사진과 지인들, 시인의 아버지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함께 죽음을 견뎌낸 시인의 딸도 보입니다. 흑백사진 속의 시인의 모습은 담담합니다. 그렇게 시인의 글도 담담합니다. 자신의 투병시절을 담은 '투병기'에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지?"라는 절규가 없습니다. 죽은 아이에 대한 비통한 외침도 없습니다. 모든 현실을 내 것으로 받아안는 시인만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재생시켜야할 물건'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세상과 소통하게 될 무렵 시인은 관계의 소중함을 느낍니다. '나에게도 사물의 양면이 중요해졌다. 살아있음이 지니는 기쁨과 슬픔, 그 양면성, 가장 허위로운 것 속의 진실, 목숨의 불확실, 가랑잎 같음, 순종… 우리가 알고 있다면 진실로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모른다고 하면 또 얼마나 모르고 있는 것인가. 이 모든 것들 속에서 우리는 종소리처럼 서로를 울려 주며 하나의 줄에 묶여 가는 것이다.'('투병기' 중에)

추억을 회상하는 모습 또한 그저 고요합니다. 시인은 처음으로 홀로 자던 순간을, 친구의 아버지가 살인죄로 붙잡히던 날을, 여학교에 들어가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추억이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는 것이다. 추억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잠깐씩 현실을 참을 수 있는 것이다.'('잊을 수 없는 순간들' 중에)

시인은 작은 신발, 작은 짐승 새끼, 하찮은 먼지, 낡은 손수건 등 낮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전합니다. '헐벗은 그 수많은 도시의 발들, 가녀린 목줄기를, 쭈글쭈글한 손들, 축축한 눈동자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낮은 담들, 낮은 집들, 낮은 길들, 그리고 낮은 거리에 있는 무수한 맨발들… 당신은 오늘 빈 마음을 사랑해야 합니다. 빈 마음으로 당신의 마음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낮은 것들을 위하여' 중에)

'죽음의 날개가 스쳐간 자' 강은교 시인은 말합니다. "사랑하라, 여기를. 아이가 빽빽 우는 여기를. 잠이 안오는 여기를…"

전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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