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 한열 아재 없는 고향, 그리고 추석

입력 2007-09-22 08:54:07

고향은 늘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어린 날 甲紗(갑사)댕기 땋은 긴 머리채 치렁치렁 물나부리치며 흐르던 강물이 도랑물로 흐르고 있고, 발가벗고 놀던 냇가에 우뚝 섰던 큰 바위는 작은 돌에 지나지 않았다. 뒷산에 올라보면 미라처럼 누워있던 깊고 푸르던 못물은 자그마한 웅덩이에 불과하고, 호랑이가 칡덤불 속에 낮잠 자고 있다던 계전동의 달음산은 높이가 고작 200m도 안 되는 야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고향을 함부로 말하랴…. 하늘이 자꾸만 높아지는 오늘, 못둑은 비가 온 뒤라 갈대가 가을 햇살에 더욱 빛나고 있다. 愛犬(애견) 우슬이 내 곁을 떠난 지 한 해가 되었다.

고향의 한열 아재가 세상을 떠난 지는 이제 두 달가량 되었다. 한열 아재는 종숙이지만 나이는 내보다 한 살 밑이었다. 어릴 때부터 머리 크기가 단지만 하다고 해서 '아이 단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두대발'이라고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한열 아재는 어릴 때도 한열이었고,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택호도 없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열'이라고 이름을 불렀다. 고향을 떠나 살면서 어쩌다 다니러 가면 "조카 오나…"라고 반겨주던 한열 아재. '한열'이는 평생을 따라다니던 어쩔 수 없는 그의 이름 석 자였다.

한열 아재는 아침에 일어나면 風磬(풍경) 소리 땡그랑땡그랑 요란한 마구간에서 소 목덜미를 쓰다듬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노간주나무를 베어 쇠코뚜레를 만들고, 들에서 점심을 먹을 때 젓가락이 없어도 나뭇가지를 뚝 꺾어 대충 맞춘 것으로 밥을 잘도 먹었다.

풋보리 떡보리 먼저 베어다 먹고, 보리 누름에 조개 잡으러 강에 들어가고, 대소가 잔칫집 초상집 궂은 일은 도맡아 거들다가, 돼지 뒷다리 슬쩍 숨겨가기도 하던 한열 아재. 그 머리 모양새는 쑥대밭 같고, 얼굴은 말뚝같이 생겼다.

집안 누구 결혼 사진 한귀퉁이에 얼굴 안 내민 적이 없고, 누구네 집 별식이라도 할라치면 먼저 상머리에 앉았다가 핀잔을 받고는 뒷자리로 슬그머니 밀려나곤 하던…. 새옷 한 벌 걸쳐보지 못하고, 늘어나는 빚 때문에 근심이 떠날 날이 없었던 한열 아재.

가난에 쪼들려 더 밑으로 내려가려고 해도 내려갈 곳이 없는 고난의 삶을 살았던 한열 아재. 그러던 그가 올 여름 세상을 떠났다. 경운기에 고추 모종을 싣고 가다가 화물차에 부딪혀서…. 종조모댁 맏아들 한열 아재는 평생을 농사 지으며 고향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살다가 고향에서 죽어 고향땅에 묻혔다. 농사를 지으며 사치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삶을 느리고 더디게 가꾸며 살아온 한열 아재.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정감 없는 무서운 세월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어쩌면 농사를 지으며 따뜻한 마음을 나누면서 살아가던 한열 아재 같은 사람이 자꾸만 사라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열 아재가 살아 있을 때의 고향은 고향 냄새를 듬뿍 지니고 있었는데, 한열 아재 없는 고향은 사람 냄새가 사라지고 없다.

추석 때 고향에 가도 이제 더 이상 한열 아재는 볼 수가 없다. 고향 마을 어귀 강 위에 길게 누웠던 나무다리가 이제는 시멘트다리로 바뀌었다. 물굽이 도는 갈대숲에는 분뇨 탱크가 축조되어 맑은 강물도 흐려지고, 냇가에 하늘대던 청람풀꽃도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을을 감싸안고 있던 감나무, 장독가의 분꽃 맨드라미 접시꽃, 푸른 강물 위로 칠칠한 그림자를 드리우던 수양버들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나는 한동안 논배미에 앉아 벼 익은 하늘 아래 시멘트로 변한 나무다리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종조모댁 뒤란에 피는 석류꽃 붉은 알알들이 한열 아재 얼굴과 겹쳐져 자꾸만 아득하게 오버랩되고 있다. 도광의(시인·전 대구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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