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식 행정자치부 1차관을 만나다

입력 2007-09-17 07:44:52

"니를 사랑하니 남도 배려하게 돼"

경주 출신의 최양식(55) 행정자치부 1차관은 광화문 정부 1청사 건물의 방호원·청소부들 사이에선 '빵 사다주는 대머리 아저씨', 두 아들에겐 '팬티에 1만 원을 넣어주는 아빠'로 통한다. 이 같은 별명이 붙은 것은 그의 생활 습관에서 비롯됐다.

그는 오전 1시부터 5시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면 그를 둘러싼 모든 이들과 일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먼저 부모와 부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뒤, 자고 있는 두 아들의 방으로 가 용돈이라며 1만 원씩을 팬티에 넣어주고 출근한다. 그러면 출근하는 도중 두 아들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온다. '재정적인 지원은 감사하나 책상에 있는 지갑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청사로 들어서면 인사 한 번도 그냥 스쳐 지나는 법이 없다. 입구에서부터 차관실에 들어가기까지 모든 직원들과 눈을 마주치며 반갑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그는 "소리를 내면서 먼저 찾아가 스킨십을 나누는 인사(시각-청각-촉각이 동반된 인사)가 더 유쾌하다."며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저 먼저 갑니다'보다 상대방을 중심으로 한 '즐겁게 놀다 가십시오'라는 인사가 좋다."고 인사에 관한 지론을 폈다.

휴일 근무 때는 고생하는 방호원들에게 빵이나 우유 등 간식거리를 사서 건네준다. 최 차관은 "청사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당연히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며 "나를 지탱해주는 사람은 묵묵히 일해주는 동료와 하급 직원들이지 높은 분들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술 안 마시고 차관 되는 게 술 마시고 목사 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는데 저 같은 경우엔 술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인심을 쌓는 전략을 택했다."고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최 차관은 차관에 오르기까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너무나 컸다고 했다. 특히 대학시절 자신이 등록금을 낸 것은 단 한 번밖에 없다. 나머지는 대학총장에게 편지를 쓰고, 대학 교수에게 부탁하는 등 신세를 지고 공부해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동료,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30년을 공직에 몸담을 수 있었다는 것.

때문에 그는 베푸는 데 있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처지다. 양친과 함께 3대가 함께 아옹다옹 살아가는 김 차관의 넘치는 가족 행복은 자연스레 이웃 사랑으로 이어진다.

두 아들은 할아버지·할머니를 공경할 뿐더러 사회봉사 활동에도 관심이 많다. 부인 역시 결손가정 학생, 불우한 이웃들을 집으로 데려와 음식을 대접하고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일을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최 차관 역시 대학원 최고 경영자과정 등에서 받은 강사료는 비서관에게 맡겨 불우이웃돕기나 시설 방문 등에 기탁금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정부부처의 강의나 학회 등에서는 강사료를 일절 받지 않는 철칙을 갖고 있다.

그는 경주중·대구고를 나오고 중앙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20회 행정고시에 합격, 1977년 경북 영양군에서 수습 사무관으로 일했다. 이듬해 행자부로 발령나 인사·기획파트·의정관·인사국장·기획관리실장·정부혁신 본부장 등을 거쳐 1차관의 자리에 올랐다.

최 차관은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의 출발점"이라며 "멀리 타 지역에 출장간 아버지가 거실 액자 뒤에 2만 원을 숨겨두고 아들에게 피자를 시켜줄 수 있는 마음이 아들에겐 감동"이라고 친절을 한 예로 들어 설명했다.

그는 공직에서 물러나면 베트남으로 가 국가 개조운동을 도울 계획도 세우고 있다. 오래전부터 베트남 내무차관과 의형제를 맺고 있어, 그 나라를 잘사는 나라로 만드는 일에 일조하고 싶단다. 그는 ▷매연과 교통혼란의 원인이 되는 오토바이를 없애고 마을버스와 지선버스를 도입할 것 ▷국민들을 위해 한자 중심의 정신문명을 회복할 것 ▷하노이 홍강을 한강보다 더 멋지게 개발할 것 등 3개 발전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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