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찾아서] 천도교 성지⑤-신문화운동의 현장

입력 2007-09-06 07:55:34

'개벽'…'신여성'…'빼앗긴 들' 대한을 깨우다

4일 오전 찾아본 서울 종로구 경운동 수운회관(지하철 3호선 안국역 바로 앞) 주차장 왼쪽 출입구 벽에 붙어있는 '개벽사 터' 동판이 온 땅을 녹여버릴 듯 뜨겁게 달구던 노염을 물리치고 슬며시 돌아온 초추(初秋)의 빛을 받고 있다. '북(北)에는 소월, 남(南)에는 상화'라고 일컬어지는 상화 시인이 남긴 불멸의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그 6호에 개재했던 '개벽'(開壁)이 여기서 발간되었던가? 서울 도심을 오가는 사람들은 한 줄 글로 초라한 흔적만 남기고 있는 '개벽사 터' 를 알기나 할까? 표정없이 스쳐 지나가는 발길들만 무심하다.

천도교가 운영했던 '개벽'은 창간호부터 조선총독부로부터 수난을 받기 시작하여, 통권 72호를 마지막으로 강제폐간당하기까지 '발간 7년' 동안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다. 압수가 무려 35회, 삭제 벌금 판금조치는 다반사였다. 폐간호인 1926년 8월호는 총독부 경무국에서 깡그리 가져가 작두로 자근자근 썰어서 폐기처분했다.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김팔봉 김안서 김소월 이상화 주요한 오상순 이은상 등 수많은 소설가와 시인들이 작품을 발표, 우리나라 문학사상에도 지대한 업적을 남긴 '개벽'은 겨우 한 장의 동판(사진)으로 남아 있다. 자그마한 동판 한 장에 담긴 개벽사의 의미, 그런 문화·교육 운동을 통해 식민 치하 조선인과 일거수 일투족을 같이했던 민족 종교 천도교를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 불러주어야 할까?

◈ 민족과 함께한 수난사

당장 숨통을 끊어놓을 듯 사방으로 조선사람의 목을 조이던 일제 강점기, 천도교는 암담한 민족의 현실과 명운을 같이했다. 그래서 가공할 만한 핍박을 받았고, 형편없이 추락했다. 개벽사의 '7년 스토리'에서 보듯이 한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천도교는 근본을 잃지 않기 위해, 새로운 세상을 위해 일찍이 시도한 갖가지 문화, 교육, 청년, 여성 운동으로 '질곡의 강'을 건너야했다. 수많은 사람이 빠져 죽고, 재산을 잃었다. 게다가 총독부에서는 천도교 말살 책동도 서슴지 않았다. 3·1운동이 터지던 시기를 즈음해서 일백만 신도를 헤아리던 천도교 위상은 지금 그 십분의 일로 줄어들었다. 가히 '종교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종교에 대해서 허용적인 한국적 풍토에서 타 종교가 기하급수적으로 교세를 불린 것에 비하면 천도교의 상대적 위축감은 훨씬 더하다. 천도교 내부적인 문제요인도 없지는 않았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총독부에 빌붙어 천도교에 해코지를 하고 제 앞길만 챙긴 기회주의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천도교의 현주소는 '일제 36년' 동안 항일 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자금을 대고, 신문화와 교육운동을 통하여 '변신'을 시도하는 천도교를 총독부가 가만히 두지 않은 요인이 가장 크다.

◈ 5천 년 역사에 서린 할머니들의 한

지구를 타고 앉아 포효하는 호랑이를 그린 표지 그림과 일부 내용이 불순하다 하여 창간호부터 압수를 당하였던 '개벽'이 가장 악질적인 잡지로 낙인찍혔다면, 천도교가 발간한 두 번째 여성잡지 '신여성'은 제호가 진보적이고, 일부 기사가 선동적이라며 총독부가 일 년 동안 발간을 허용치 않아서 1923년에야 창간호를 내게 되었다.

식민시절, 천도교가 편 신문화운동은 우리나라 첫 언론종합잡지인 '개벽', 여성잡지인 '부인' '신여성',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한 아동문학잡지 '어린이', 개벽 폐간 이후 그 정신을 이어받은 '혜성', 좌익잡지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제일선', 1932년 무려 200만 부나 찍어서 개벽사의 4대지(별건곤, 제일선, 신여성, 어린이) 애독자에게 무료로 배포하였다는 당시 신문광고가 남아있는 '신경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천도교 종립대학원은 과거 천도교의 문화운동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 종립대학원의 왼쪽 유물관에는 당시 천도교에서 발행하였던 각종 서적들이 비치되어 있어 고단함을 넘어서서 민족 속으로 나아갔던 천도교의 과거를 만날 수 있다.

당시 천도교는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어린이는 어른의 소유물이 아니라, 똑같은 인격권이 있음을 계몽해나갔나 하면, 5천 년 역사의 이면에 서려있는 할머니로 상징되는 여성의 인권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관심을 보였다. 동아일보가 1931년에 시작한 브 나르도 운동보다 더 일찍 여성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천도교 청년회는 YMCA 다음으로 빨리 태동하였다.

◈ 대구 명신여학교의 '페미니즘'

천도교의 여성운동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에서 가장 초기를 장식한다. 천도교 내수단을 이끈 주옥경 여사가 그 중심인물로 주 여사의 근거지는 성북구 우이동 봉황각 한쪽 살림방이다. 지금도 봉황각 마루에 올라서면 단아하고, 세상 욕심이라고는 단 한 점도 없었던 주 여사의 청빈하고, 겸손하며 시대를 앞서가는 안목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천도교의 여성에 대한 관심은 교단내 여성(내수도라 일컬음) 모임인 내수단(오늘날 천도교 여성회)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여성교육운동 등 여러 갈래로 나타났다.

지역에서 천도교가 여성교육에 관심을 보인 현장은 대구 명신여학교이다. 천도교는 경영난에 빠진 대구명신여학교를 인수, 경영하다가 김울산 여사에게 넘겼다. 대구 명신여학교는 순종이 대구를 순시하면서 내린 하사금 200원을 종자돈으로 1910년 8월 26일, 대구 여성의 개화교육을 위해 문을 열었다. 김울산 여사가 인수한 이 학교는 오늘날 복명초등학교로 1백 년 역사를 이어오는 '장수 학교'이다.

천도교는 지역의 명신여학교뿐 아니라 당시 조동식이 설립, 경영해오던 동덕여학교 역시 경영난에 부딪히자 특별기부금(100원)을 희사했는가 하면, 매월 보조금을 주기도 하였다. 오늘날 '동덕(同德)' 여학교가 그 후신이다. 의암 선생의 아내로 3·1만세 이후, 태화관에서 왜경에게 잡혀가 그길로 온갖 고문을 다 당하여 감옥에 있는 선생을 옥바라지 하기 위해 감옥 앞 시체안치소에 방 한칸 얻어서 생활할 정도로 용감하고 배포가 컸다. 동경유학까지 다녀온 주옥경은 여성들이 일하는 데 불편한 저고리 고름은 떼어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의 생활한복과 같은 구상을 그 시절에 벌써 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천도교는 고름을 매지않는 한복을 입는다.

◈ 대구 남산동에 교남학교 세워

천도교가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 전신), 동덕여학교, 명신여학교에 관여한 것 못지않게, 지역 교육계에도 깊이 영향을 끼친 사건이 바로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학교 전신) 설립과 경영이다. 대구 교남학교는 홍주일, 김영서, 정운기 3인이 설립하였고, 초대 교장은 정운기가 맡았다. 청도 운문사람인 홍주일은 대구 안일암(현 앞산 안일사)에서 시회를 가장하여 도모되었던 조선국권회복단 사건의 주역이다. 홍주일은 조선국권회복단 사건으로 인해 일 년여 복역하고 나와서도, 광복회 의용민족대동단 등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요시찰인물이던 홍주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집 백남채 정재순 등과 함께 대구 3·1운동을 주모하였다. 왜경은 서울에서 의암 손병희 등의 주도로 3·1운동이 터지자, 홍주일을 예비검속하여 감옥에 처넣어버렸다. 3·1운동 복역 후 출옥한 홍주일, 김영서 등은 새로운 민족학교를 짓기로 하고, 교남학교를 창설할 것을 완전 합의하였다. 첫 교사는 이장가의 우현서루로 정해졌다. 지금의 대구은행 북성로 자리에 들어섰던 우현서루는 소남 이일우 선생이 사비로 중국 등지에서 1만여 권의 서적을 수입, 청년들을 위한 공간으로 제공되었다. 우현서루 이후 교남학교는 대구 남산동으로 정해졌다. 교남학교가 서있던 남산동에는 오랫동안 교남학교의 옛 건물을 거의 유지하고 있었으나 지난 1, 2년 사이 반월당 삼정코아란 건물이 들어서면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이 교남학교 3인 설립자 중 한 사람이자 교편을 잡았던 홍주일(당시 천도교 대구교구장)의 장례식은 학교장으로 치러졌다. 모든 존재는 한울님을 가슴속에 모시고 사는 평등한 존재라는 시천주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는 천도교 대구교구장이자 대륜학교 설립자 홍주일 선생이 가던 날, 하늘에서는 애도의 폭우가 쏟아졌다.

글 사진·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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