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국민을 정치IQ 50으로 보나?

입력 2007-08-30 10:22:05

미 백악관 비서실 칼 로브 부실장이 8월말 자리에서 물러난다. 부시 대통령과 30년 정치여정을 함께 하며 1994년과 1998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 2000년과 2004년 대통령 선거를 승리로 이끈 1등 공신이다. 좋게 말하면 선거 전략의 천재고, 나쁘게 말하면 간교한 선거기술자다. 아버지 부시의 후광 말고는 정치적 자산이나 변변한 업적도 없는 부시 대통령을 지금의 위치로 끌어올린 것은 기실 로브의 선거기술 덕분이라는 소리가 없지 않다. 로브는 그래서 절대적 신임과 권한을 함께 누렸다.

그는 마키아벨리즘의 신봉자다. 승자가 곧 정의인 만큼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치밀한 네거티브 전략을 구사했다. 상대 후보의 장점을 약점으로 바꾸기 위한 대중 조작술을 동원하고, 대통령 재선을 위해 이라크 전을 선동하는 술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선거기술은 부시를 건져냈지만 미국은 알맹이 없는 대통령을 뽑아 구심력이 훼손된 상태다. 로브는 미국 정치문화를 더러운 공작으로 물들인 주범으로도 비판받는다.

2002년 우리나라 대선에서의 네거티브를 로브의 그것과 비교해본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네거티브에 편승한 선거의 승리(집권)가 수권능력을 보장해주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부시와 노 대통령의 지지율이 양국 최악인 30%대 초반과 10%대를 간신히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설명한다. 그러나 네거티브의 방식은 서로 달랐다. 로브는 쉽게 말해 교활하고도 치밀한 사기를 쳤고, 한국에서는 표 도둑질을 했다. 로브가 이론을 갖춘 모사꾼이었던 데 반해 노 정권 탄생의 두 공신인 김대업 씨나 설훈 전 의원은 앞뒤 가리지 않는 막가파였다. 국민들을 속이기 위한 최소한의 정치적 형식(애매모호성)도 갖추지 않은 채 인격 테러를 서슴없이 자행했다. 그 때문에 노 대통령은 곧바로 집권의 정당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라면 그 당사자들이 정치에서, 사회에서 매장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정치문화는 그런 무도함을 전혀 부끄러이 생각지 않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구정물 세례를 받은 국민들에게 아무도 사죄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 정도로 넘어갔다. 설훈 전 의원은 범여권의 선두주자인 손학규 캠프의 핵심 참모로까지 기용되어 재기를 노리는 판이다. 이런 백주의 표 도둑질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는 어떤 정의도 기대할 수 없다.

2002년 대선에서 국민을 핫바지로 만든 네거티브의 본류는 민주당-열린우리당-민주신당으로 이어져왔다. 민주신당이 당명을 100번 바꾼다 해도 그 원죄는 사라질 수 없다. 그런 민주신당의 범여권 주자 9명이 대선 예비경선에 들어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박의 꿈에 부풀어 있는 듯 보인다. 10%에도 못 미치는 지지율이지만 경선에서만 이기면 본선에서 또 한 번 화끈한 뒤집기 쇼를 연출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멀쩡한 이회창을 난도질해 파렴치한 인간으로 만들어냈는데 흠 많은 이명박 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9월 정기국회를 아예 이명박 국감으로 몰고 가려는 기도까지 드러내고 있다. 반면 민주신당 경선후보들은 특별한 흠결이 없기 때문에 검증을 국민과 언론에 맡기고 자체검증은 건너뛰겠다고 밝혔다.

정치가 후안무치하고 무책임한 무뢰배들의 잔칫상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라의 중심을 끌고 가는 일이다. 이명박을 검증하겠다고 가시 박힌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마음에서 우러나는 참회가 선행돼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뉘우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많은 대선주자 누구의 입에서도 사죄의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지난 대박에 취해 털도 뽑지 않고 닭을 또 한 마리 잡아보겠다는 심보만 드러내고 있다. 남의 티끌은 그렇게 가차 없이 난도질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은 어째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인지 기이할 따름이다. 네거티브에 속아 넘어 간 국민들을 여전히 IQ 50정도의 바보로 여기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박진용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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