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제 분석의 기초
논술은 단순하게 글을 쓰는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이 아니다. 출제자가 요구하는 답안을 제한된 시간 속에 기술하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완전히 개방된 상상력을 요구하는 백일장 형식의 글쓰기와는 다르다. 출제자의 요구는 대체로 논제에 드러난다. 따라서 논제를 분석하는 것은 통합교과논술 글읽기와 글쓰기를 위한 전제 작업이다. 논제는 논술고사에서 주어진 문제로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출제자가 수험생들에게 요구하는 사항이다. 논제 파악을 잘못하면 출제자의 의도와 어긋나는 내용을 쓰게 되어 논술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예를 들어 (가)의 관점에서 (나)를 비판하라고 했는데 (나)의 관점에서 (가)를 비판하거나 비판의 내용이 담기지 않은 글은 논술문으로는 무의미한 글이다.
통합교과논술에서 논제로 제시되는 질문 유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제시문 (가)와 (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요약하라.
2) 제시문 (가)의 관점에서 (나)를 비판하고, (나)의 관점에서 (가)를 비판해보라.
3) 두 제시문에 나타난 관점 중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여, 그 입장에서 주어진 와 를 설명해보라.
4)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에 나타난 문제점을 해결할 방안을 제시하라.
(박정하, '통합교과형 논술에 대한 이해'에서 인용)
통합교과논술은 대체로 이렇게 구성된 한 세트의 문항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네 문항은 다음과 같은 능력을 평가한다. 1)은 기본적인 읽기 능력을 평가한다. 제시문을 비교, 대조해서 이해한 내용을 평가한다. 2)는 비판적 사고 능력을 평가한다. 3)은 도표 이해 능력을 기본으로 하여 제시문 내용을 응용하고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한다. 4)는 다양한 방향으로 접근하여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한다. 물론 이렇게 개별화된 질문 유형은 결과 중심의 평가가 아니라 과정 중심의 평가로 향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 문항을 개별화하여 사고가 파편화된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에 비해 장점이 훨씬 많다. 즉, 글쓰기를 위한 사고 과정을 분절화하여 과정을 제시함으로써 다면적인 평가가 가능해졌다. 나아가 평가의 객관성 확보에도 유리하다. 대입논술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되어온 것이 평가와 관련된 것임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교육현실과 가장 부합하는 평가의 방식을 찾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통합교과논술 이전의 논술고사도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변별력을 지니기에는 문항 자체가 통글로서의 성격이 너무 강조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논제는 어떻게 분석하는 것이 좋을까? 논제를 분석할 때 대부분 학생들은 주어진 질문에만 집착한다.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일방적인 관심을 가짐으로써 질문 이전에 전제하는 내용을 놓칠 수가 있다. 전제란 말 그대로 논증을 할 때 그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결론을 얻을 수 있는 명제를 말한다.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전제란 거짓일 수 없는 명제이다. 의외로 학생들이 논제 분석에서 쉽게 놓치는 부분이 바로 '전제'에 해당하는 문장이다. 논술은 자유로운 답을 열어 놓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출제자의 의도에 맞는 답안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출제자가 전제하고 있는 문장을 찾아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많은 학생들이 전제가 되는 문장을 찾아낼 때, 자신의 생각을 개입시킨다. 그러나 전제란 말 그대로 출제자가 전제하는 것이므로, 학생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논제의 전제는 학생이 아니라 출제자가 전제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논제를 하나 살펴보자.
다음 네 개의 제시문은 하나의 공통된 주제와 관련된 글이다. 그 주제를 말하고, 제시문 간의 연관 관계를 설명하시오. 그리고 그 주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2007 고려대 논술고사)
위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공통된 주제와 관련된 글'이라는 점이다. 제시문들은 기본적으로 '예술의 효용'에 대한 글이지만 그 내용은 다소 상이한 글이다. 먼저 찾아야 할 내용은 공통된 주제이다. 차이는 오히려 다음 질문인 제시문 사이의 연관 관계에서 다루어야 한다.
논제를 분석할 때, 그것을 머릿속에만 담아 두어서는 곤란하다. 논술문 쓰기에 몰두하다 보면 처음 논제 분석에서 생각했던 필수적인 요구 조건들을 망각하여 전체적인 글의 내용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반드시 담아야 할 내용을 놓치기가 쉽다. 따라서 논제를 분석할 때 반드시 논제의 요구 조건에 번호를 붙여 가며 구체적으로 파악해 두는 작업이 필요하다. 단,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요구 사항들의 논리적 연결 관계들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 논제를 살펴보자.
①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느낌과 생각을 과연 이해할 수 있는가? 아래 ②제시문들을 비교 분석하여 어떤 어려움들이 있는지 설명하고, ④그러한 어려움이 극복될 수 있는지 ③사회현실의 예를 들어 논하시오.(2007 연세대 논술고사 인문계)
①은 이 논술문에서 요구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나와 타인의 소통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질문 자체가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②③④를 참고하면 대답은 이해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런 방향으로 글을 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잡으면 ③④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어려울 수 있다.) ②제시문에 주어진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③의 구체적인 예를 통해 ④를 논하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논제의 요구 사항에 따라 논술문의 단락이 구성된다. 나름대로 요구 사항을 재구성하여 논술문을 작성할 수도 있지만 통합교과논술은 개별화된 질문이 주어지기 때문에 구태여 그런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 논제 분석은 논술문 작성의 시작과 끝이다.
한준희(대구통합교과논술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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