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학습)6·25 상처 간직한 칠곡

입력 2007-08-28 07:42:37

▲ (사진 위로부터)다부동 전적기념비, 낙동강 구철교, 신동 입석, 신유장군 유적지.
▲ (사진 위로부터)다부동 전적기념비, 낙동강 구철교, 신동 입석, 신유장군 유적지.

흔히 우리나라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우리나라 역사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많은 사회적 변화를 겪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쟁 중 대규모의 전투나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강을 배경으로 전개된 경우가 많은데, 이는 강이 하나의 자연적인 방어진으로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삼국 시대에 청천강을 무대로 한 살수대첩이나 고려 시대 거란군의 침입 때 홍화진을 둘러싼 귀주대첩, 그 후 임진왜란의 중요한 전투들이 강을 둘러싸고 벌어진 대표적인 전쟁이라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큰 전쟁이었던 6·25전쟁 역시 낙동강을 놓고 북한군에 맞서 국군과 유엔군이 치열하게 격전을 벌인 전쟁이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7월 말 낙동강을 건너 왜관 일대에서 반격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8월 3일,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기 위해 경부선 가운데 유일하게 낙동강을 건너는 낙동강 철교를 폭파했다. 8월 16일에 왜관 건너편 낙동강 연안에 집결한 북한군은 대규모 도하작전을 감행하였고, 유엔군은 일본에서 출발한 98대의 B-29폭격기가 26분 동안 무려 960t의 포탄을 투하하여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낙동강 왜관전투이다. '낙동강 왜관전적기념관'에는 이 전투의 참상을 알리는 자료와 당시 사용했던 각종 전투 장비와 북한군에서 노획한 총기류 및 군수품 등이 전시되어 있어 6·25전쟁의 실상을 아는데 좋은 답사 장소가 될 수 있다.

낙동강 왜관전투와 함께 남북간에 치열한 전투가 행해진 또 다른 한 곳이 칠곡군 유학산 기슭의 다부동이다. 조선시대에는 '다부원'이라는 역참이 자리했던 곳인데, 지형적인 특징 때문에 피의 전쟁터가 되었다. 다부동 서북쪽에는 유학산이, 동쪽으로는 가산이 있는데, 당시 국군의 입장에서는 이 두 산이 북한군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방어하기에 유리한 고지였다. 북한도 이 산들의 지형적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막대한 양의 군사를 투입하여 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애썼다. 현재는 이곳에 당시의 전투 상황을 설명하는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 칠곡과 낙동강에 대한 Q&A

▶낙동강은 어떤 하천인가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의 황지에서 발원하여 안동, 구미, 대구, 합천, 밀양을 거쳐 부산까지 이어지는 남한에서 가장 긴(525㎞) 하천이다. 유역면적은 한강 다음으로 넓으며(2만3천859㎢), 남한 면적의 약 25%를 차지한다. 유역에 사는 주민 수는 1천500만 명에 달하고, 우리 나라 농업 생산량의 약 33%를 담당하고 있다. 낙동강은 유량이 가장 많은 시기와 가장 적은 시기의 차이가 매우 커서(=하상 계수가 크다) 댐이나 저수지와 같은 저수 시설을 갖춰 수자원의 이용률을 높이려 하고 있다. 또한 총 유량이 한강의 25% 수준이어서 하천의 정화 능력이 낮아 오염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도 낙동강의 특징이다.

▶6·25전쟁에서 낙동강의 역할은

6·25전쟁 개전 이래 북한군의 파상적인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국군과 유엔군은 한반도를 지키고 수복 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하였다. 남해안의 마산으로부터 북쪽의 낙동리까지 낙동강 유로를 따라 약 160km, 여기서 동해안까지 약 80km의 산악 지대를 연결하는 선으로, 서쪽은 낙동강, 북쪽은 높은 산악으로 지형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방어선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는 동시에 부산을 중심으로 방어 지역의 주요 지점을 연결하는 종적, 횡적 도로망을 작전 수행에 이용하여 훗날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 칠곡에는 이런 곳도 있어요

▶낙동강 구철교

왜관읍과 약목면을 잇는 낙동강 구철교는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해 부설한 경부간 군용철도의 교량이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을 중심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 국군과 유엔군은 적군의 도하방지를 위해 이 교량을 폭파하였다. 전쟁 당시에는 유일한 철교였으나 복구 이후에는 인도교로 활용해왔다. 다리난간 곳곳엔 6·25 당시의 상흔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다리를 지탱하는 두꺼운 철판들이 마치 양철 조각처럼 심하게 휘었으며, 다리 위에 설치한 철골조 '트러스트'에도 수박만한 구멍이 뻥 뚫려 당시의 참상을 알 수 있게 한다. 철도청에서는 한때 철거를 검토했으나 "호국의 상흔을 간직한 이 다리를 보존하자."는 칠곡군민들의 의견을 수렴, 지난 1993년에 복구하여 '호국의 다리'로 이름지어 주민들의 인도로 활용되고 있다.

▶신동 입석

입석은 선사시대 거석문화의 한 형태로 지역 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액운을 막아 주는 신앙의 대상물로 세워졌다. 신동 입석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선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높이가 4.5m, 밑둘레 2m이며 묘의 면적은 300평 정도이다. 이 선돌의 동쪽 주변을 개간할 때 민무늬토기와 돌도끼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임을 알 수 있다.

▶신유장군 유적지

이곳은 조선 효종 때의 무장 신유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신유 장군은 광해군 11년(1619)에 이 고장에서 출생하여 27세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 등 여러 무직을 거쳐 효종 9년(1658) 함경북도병마우후에 있을 때, 청나라의 요청을 받아 원군을 이끌고 흑룡강 부근에서 그곳에 침입한 스테파노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이를 '나선정벌'이라 하며, 이 원정의 전말을 '북정일기'라는 기록으로 후세에 남겼다. 4번 국도에서 비룡산 방향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1.5km 정도 올라가면 볼 수 있으며, 주변에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아 잠시 쉬어가는 데 알맞다.

▶구상문학관

구상문학관은 세계 200대 문인 반열에 오른 구상 선생의 선양과 한국시문학에 끼친 업적을 보존하고 22년간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한 관수재를 복원하여 시인의 삶과 문학과 구도자적 정신세계를 영원히 이어가고자 건립된 곳이다. 200여 평 규모의 2층 건물로, 1층에는 문단 활동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구상 시인이 기증한 2만 2천여 권의 소장도서가 있다.

글 : 강문철(경북고 교사, 삶터탐구연구회)

참고자료 : 삶터 탐구의 길잡이(대구광역시 남부교육청), 낙동강을 따라가 보자(금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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