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초 '문민정부' 시절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출신의 한 당료는 대구 동구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를 준비했다. 兎死狗烹(토사구팽)된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물러난 자리였다. 그는 그해 8월로 예정된 보궐선거 출마를 준비하면서 미국 출국을 계획했다. 선거를 불과 몇 달 앞둔 '중요한 시기'에 그가 미국에 가려 했던 것은 '부족한 학력'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대학 졸업장을 갖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그는 막상 출마를 결심하고 보니 이력서의 학력란이 더욱 허전해 보였다. 그래서 미국 대학의 단기 연구과정에라도 잠시 등록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 가지 않았다. '가방 끈이 길고 학벌이 좋은' 후보와의 공천 경쟁에서 탈락해 미국에 갈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 정치권에선 '학력 세탁'이 관행이었고 유행이었다. 학력란이 허전한 많은 인사들이 학력과 무관하게 입학이 가능한 각 대학의 대학원 최고위 과정에 등록해 유권자들의 눈을 속였다. 이로 인해 유권자들의 판단이 흐려진 것은 물론이다. 정치권의 '학력 세탁'에 제동이 걸린 것은 1994년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제정 이후로 기억한다. 관행으로 묵인해온 '학력 세탁'을 처벌하는 조항이 신설된 것이다.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학력 위조에서 비롯된 학력 검증 열풍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문화예술계에서 시작된 검증 여파가 연예계로 번져 해명과 변명이 꼬리를 물고 있다. 그나마 '학벌'보다 '능력'이 중시되는 문화예술계와 연예계의 '학력 세탁'이 이처럼 광범위하다면 능력보다 학벌이 훨씬 중요한 잣대인 분야는 말할 것도 없겠다.
'학력 세탁' 의혹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적극적 위'변조자도 있고 소극적 대처로 오해하도록 내버려 둔 경우도 있었다. '학벌 사회의 병폐' 운운하며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주장도 있으나 어쨌든 그들은 위조 학력으로 유무형의 부당 이득을 취한 사람들이다. 모자란 학력을 피눈물나는 자기 연마로 채우며 경쟁한 사람들보다 수월하게 그 지위에 올랐거나 돈을 벌고 명성을 얻은 것은 틀림없지 않은가. 설사 직접적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좋은 이미지나 사회적 인정은 얻었을 것이다.
계속되는 검증 열풍에 신물이 난다는 의견도 있다. 특히 연예계의 학력 검증은 대중들의 '저급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정도에 불과하지 않으냐는 비판이다. 하지만 특정인을 비난하거나 매도하는 방편이 아닌 검증은 계속돼야 한다. 이번 학력 검증은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진통이 돼야 한다. 그러려면 검증 과정에서 반성과 교훈을 얻어야 한다.
먼저 '자아 비판'을 해야할 곳은 대학들이다. '학력 세탁' 저명 인사들의 거짓말을 묵인하며 대학 홍보에 이용했다고 해서가 아니다. 우수 대학을 나온 사람들보다 더 실력이 뛰어난 '학력 세탁자'들이 많았다는 건 우리 대학들이 제 역할을 못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특히 대학 서열화를 통해 우수 학생들을 싹쓸이하고도 제대로 된 인재를 키워내지 못한 이른바 '명문 대학'들은 통절한 자기 반성을 해야 한다.
학력 검증 열풍이 우리에게 던진 話頭(화두)는 '학력 및 학벌 사회'가 아닌 '능력 사회'로의 移行(이행)이다. 학력이나 학벌이 아닌 능력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망국적 사교육 광풍도 명문대학을 나와야 괜찮은 직장을 얻고 급여도 더 많이 받고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딴 '간판'이 평생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상황인 터에 어느 누가 미치지 않겠는가. 심지어 변호사'회계사 등 전문직마저 학벌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지 않은가.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에선 '거대 담론'이나 거창한 공약 대신 '학력 및 학벌 사회 타파'를 위한 실천적 대안을 내놓는 후보가 나오길 바란다.
曺永昌 논설위원 cyc58@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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