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찾아서] 천주교 성지 (13)병인박해 순교자 모신 대구복자성당

입력 2007-08-23 09:48:21

대구시 동구 신천 3동 청구네거리에 있는 복자성당은 여느 성당과 다르다. 그냥 어디서나 보고, 만날 수 있는 일개 성당이 아니라,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순교자들의 불사불멸의 영혼이 살아있고, 그분들의 위대한 유해가 모셔져 있는 도심 속 성지이다. 개발 일변도, 편의 지상주의를 지향하는 대도시에서는 지극히 만나기 어려운 역사 공간이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순교성지이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병인박해(1866년) 100주년을 현양하기 위해 각 교구별로 성당 건립의 뜻을 세웠고, 전국 교구 가운데 대구대교구 교우들이 가장 먼저(1964년 11월 9일) 그 뜻을 먼저 받아들여 각 본당마다 순회순교자의 밤을 열고, 십시일반 교우들이 주머니돈을 내어 지난 1970년 1월 1일에 축성하였다. 이렇게 봉헌된 대구 복자성당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세상에서 점점 약화되는 순교신심을 곧추세우며, 물질만능과 쾌락일변도로 흐르는 현세태를 거슬러 순수한 믿음의 생활로 이끌어줄 수 있는 성역이다. 이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어찌 생각해보면 대구 복자성당은 2% 부족하다. 왜? 대구 복자성당은 다른 본당에서 모시지 못한 국내외 순교자, 성인들의 유해, 대구대교구 초기 십자고상 등 소중한 유물들을 많이 모시고 있어서 더 피부적으로 와닿는 도심 속 성지로 업그레이드되어야 할 가능성과 의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대교구 초기 십자고상이 복자성당에 있어요

2002년 9월 대구 복자성당은 울산 장대벌에서 군문효수당한 3분 순교자, 즉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의 유해를 모신 묘역을 성역답게 재단장하였다. 죽음이 닥쳤다고 결코 변절하지 않는 순교자들의 푸른 넋인양 키 큰 소나무들이 묘역을 둘러싸고 있고, 묘역 중앙에는 야외 십자고상이 세워져 있다. 이 십자고상도 보통 고상이 아니다. 지난 2000년에 세워진 이 십자가의 고상은 대구대교구 설정(1911년 4월 8일) 25주년과 초대 교구장 안세화 드망즈 주교 성성 25주년을 기념하여 1936년 6월 11일 주교좌 계산성당에 세워졌던 바로 그 성상이다. 이 십자고상은 오래된데다 야외에 세워져 있었던 터라 고상 일부가 부식되어 지난 94년에 해체되었었다. 그뒤 약간의 보수를 거쳐 2000년 12월 15일 대구 복자성당에 설치되었다. 대구대교구의 역사와 숨결을 같이한 '귀한' 십자고상이 대구 복자성당의 성역을 지키며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병인박해 때 군문효수당한 세분 순교자

이 십자고상이 지키고 서 있는 순교자 묘역에는 잘 알려져 있듯이 병인박해 때 경주 단석산 범굴에서 체포되어, 울산으로 끌려간 지 이틀 만에 장대벌에서 군문효수당한 허인백 김종륜 이양등 세 분 순교자가 영면을 취하고 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20위의 순교자 가운데 3분이다. 세 분 순교자는 1868년 참수당한 뒤, 허인백 야고보의 아내 박조예(혹은 박조이, 조아) 여사에 의해 울산 동천강변에 임시로 묻혔다가, 갑오경장 때 순교자들의 신원이 회복되자 김종륜 루카의 후손들이 사는 경주 진목정으로 옮겨졌다. 경주 진목정은 세 분 순교자가 숨어살다가 죽음의 길로 끌려간 단석산 범굴이 있는 곳으로 지금도 세 분의 허묘와 근래 조성된 14처가 있는 순교성지로 아름답게 남아있다. 경주 진목정에서 대구 월배 감천리 묘지로 다시 이장된 세 분 순교자의 유해는 병인박해 현양성당으로 봉헌된 대구 복자성당으로 최종 안장되었다. 1973년 10월 13일의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구 복자성당은 순교자 현양 기념성당으로서 면모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고, 2002년 본당 차원에서 성역을 재단장하였다. 2천 년 역사를 지닌 천주교를 지켜온 핵심 가운데 하나인 순교신심을 되살리는 일의 소중함을 그만큼 잘 받아들인 셈이다.

◈다 버려야 얻는 진리, 자네들은 아는가?

대구 복자성당 순교자묘역에 서면 국법으로 천주교를 탄압하던 시절, 천주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정처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을 해야만 했던 이들의 애환에 가슴이 저려온다.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누리고, 때로는 일상에 묻혀 퇴색시켜버리기까지 하는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임을 떠올리고 옷깃을 여민다. 죽음의 강나루를 건너와 주님의 품에 안긴 순교자들은 죽지않는 불사불멸의 영혼이 되어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에게 말을 건다. "모든 것을 버려야 얻는 역설, 알고 있는가? 그를 위해서 우리들은 형제처럼 같은 길을 택하여 나란히 다 버렸고, 딱 한 가지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네. 바로 구원일세. 자네들도 구원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순교자 묘역에 서면 새삼 진리는 단순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 영화를 다 누려도 영원한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인가? 순교자들의 믿음은 그렇게 강하고 또 강했을 것이다. 나지막해서 평온하고, 푸른 잔디가 싱그러움을 더해주고, 철따라 피고 지는 꽃이 순교자들의 넋인양 아름다운 복자성당의 순교자 묘역은 그 의미에 걸맞게 재단장되어 보기좋다. 그러나 순교자 묘역 성역화가 끝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제 시작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복자성당에는 성인 유해도 있어요

그만큼 도심 속 순교성지인 대구 복자성당이 가야 할 길은 멀고 힘들지 모른다. '순교자 묘역을 성역화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또 시작이라니 무슨 소리야.'라고 할 신자들이 없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구 복자성당에는 병인박해 때 울산 장대벌에서 참수당한 허인백 김종륜 이양등 세 분 순교자의 유해만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다. 복자 성당 감실에는 우리나라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또 '제대에는 우리나라 첫 신부인 김대건 성인의 유해(등뼈)와 파리외방전교회 순교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보다 더 큰 자산을 갖고 있는 본당이 대구에 또 어디 있을까? 대구 복자성당의 주보성인인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1970년 5월 10일에, 다른 성인들의 유해 봉안함은 1988년 2월 25일에 축성되었다. 성인들의 유해가 어떻게 대구 복자성당으로 오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 본당 교우들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대구 관덕정 순교기념관이나 한티순교성지가 건립되기 전에 대구에서 성인유물전시회가 열렸었고, 그 뒤 복자성당으로 모셔지게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거 복자성당에 있었던 복자 유물관(지금은 레지오 회합실 등으로 쓰임)은 그래서 생겨났었다.

◈도심속 성지로 거듭나야 할 복자성당

천주교 대구대교구 순교기념관인 관덕정에 모셔져 있는 36명 성인, 복자의 유해는 임지로 떠나는 선교사들에게 죽음을 각오하라는 의미로 교회 장상(원로)들이 파견 신부들의 목에 걸어주었던 것이지만, 이곳 복자성당의 성인 유해는 미션임무를 띠고 조선으로 입국했다가 국내에서 참수당한 성인들의 유해인 점이 다르다. 그만큼 한국 천주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특별한 본당이 바로 대구 복자성당이다. 그런 의미를 지닌 성당이기에 지금은 없어진 유물관을 발전적으로 재단장해 도심속 순교성지로 거듭나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급하게 서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잊지 말고 한 사람의 교우라도 더 알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올 9월 순교성월이면, 천주교 대구대교구 내 3대리구 본당 신자들이 순교성지 복자성당을 순례하게 된다. 이때, 세 분 순교자 외에 복자본당 감실과 제대에 김대건 신부,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것을 미리 알려주고, 묵상이라도 하도록 이끌면 어떨까? 건립 동기가 뚜렷하고, 다른 본당에서 꿈도 꾸지 못할 소중한 성인 유해, 순교자 유해를 모시고 있는 복자성당이 대구에 있는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맙고 또 고맙다.

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권정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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