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전라남도 땅 끝 마을까지는 대략 600㎞가 된다. 승용차로 이동을 한다고 해도 오가는데만 8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만만찮은 거리다. 쇠도 휘어 질듯한 불볕더위 속에서 땅 끝, 남원, 함양을 지나 거창으로 걸어가고 있는 유인촌씨를 만났다.
그와 만나기로 해놓고는 난감해졌다. 뚜렷한 약속장소가 없어서다. 그가 가르쳐준 위치정보라고는 함양을 지나서 국도를 따라 거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뿐. 한참을 헤매다 거창까지 16km 정도 남은 지점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갓길을 걷고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달 27일 날 출발해서 벌써 11일째 계속 걷고만 있는 그. 반바지 차림에 등산 가방을 달랑 메고 황토색으로 염색한 띠를 이마 한가운데 동여맨 그의 차림새는 영락없는 이웃집 아저씨다. 함께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를 걸었지만 벌써 숨이 막혀온다. "더운데 왜 걷습니까?"라고 당연한 질문을 던졌다.
"걸으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요. 걸으면서 더 많은 세상을 볼 수 있고, 마음에 담겨있는 것들을 정리 할 수 있어서 좋아요."
하루 40㎞씩 걷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걷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고 말하지만 오로지 자신과 처절하게 싸워서 이겨내야 하는 그의 모습에서 외로움이 비쳤다.
"지역마다 사람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잖아요. 걸어오면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지역도 느껴보고, 자연과 문화에 대한 소중한 경험들을 하면서 내가 뭘 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지요." 길을 지나던 차량들 속에서 응원의 소리가 터져나온다. "우와~ 유인촌이다. 아저씨 왜 걸으세요? 화이팅입니다!" 그가 더 힘차게 손을 흔들면서 답례를 한다.
1974년도에 일일드라마 '강남가족'으로 시청자들한테 첫 데뷔무대를 치른 그는, 이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수 십 편에 드라마에 출연했고, 연극도 꾸준하게 올리면서 무대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에너지로 관객을 휘어잡았다. 서울문화재단 대표를 맡고는 크고 굵직한 문화관련 일을 하면서 문화행정가라는 명칭까지 얻었다.
그는 서울문화재단을 일을 맡으면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기치를 세웠다.
"문화관련 예산이 생계보조형 차원으로 이루어지는 게 싫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경쟁이 없는 거예요. 당연히 발전도 없죠. 엄청난 돈이 목적없이 사라지는 것이 싫어서 '선택과 집중'을 택했습니다."
300km를 걸어오는 동안 장염과 탈수로 입원도 했었지만, 정신력 하나로 무장하고 다시 걸었다. 발 뒷꿈치가 금이 가고 물집이 생기고 터지면서 걸어왔지만, 지역 곳곳의 자연과 문화를 보고 걸으면서 두 발이 땅을 향해 내 딛는 것 자체에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 했다.
"사람 살아가는 게 문화예요. 문화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있는 거잖아. 지역마다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 고유한 문화들의 독창성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걸 키우고 육성해야 하죠. 지역의 고유문화들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기업이 나서고 정부가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혹시나 정치성과 연관은 없는 걸까'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는데, 시원하게 답을 내려놓는다.
"문화관련 일은 문화를 아는 사람이 하는 겁니다. 전 문화 전문가입니다. 정치적 의도는 없어요. 문화의 희망이 보일 때까지 일을 할거에요. 정치를 생각했다면 걷지 않고 유세하면 되잖아. 그런데 난 걷잖아요. 다른 거지요."
그는 방송을 해서 번 돈을 연극에 다 쏟아붓기로 유명하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연극은 버릴 수 없는 그의 분신이자 삶이다.
"방송에서 번 돈 다 연극에 투자했어요. 돈 벌려고 한 게 아니라 그게 좋아서. 그냥 내 일이예요. 연극은 그냥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니까 실패를 하던 성공을 하던 담담해지는 거죠."
방송을 안하게 된 이유도 힘이 있을 때 무대에서 연극을 하고 싶어서라고 말할 정도로 연극에 철저하게 몰입해 있었다. 그는 인생의 황혼이 되서 많은 것을 담아 낼 수 있을 때 다시 방송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거창국제연극제 현수막이 이제 거창 땅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20㎞를 같이 걸어오면서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땀도 닦지 않는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오로지 걷기에만 집중되어있다. 다음날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걱정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도 걷고 계십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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