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예술을 낳는다)⑬시인 이경림

입력 2007-08-03 07:08:20

"내가 詩를 쓰는 순간 세상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눈이 내린다.표정 없는.백치같은.아이의.날들이.녹슨.쇠창살.사이를.빈틈없이.메꾼다.쓰고.흰.알약들이.촘촘히.떨어져.쌓인다.무겁게….'

정신병동에 갇힌 여인이 쓴 시다. 검은 알약 같은 마침표를 어지러이 찍으며, 흩어진 의식을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시는 이어진다. '…어둠의.아무도 없음의.텅텅텅.빈집의.어 엄마 무서워무서워무서워워워워.짖는.개.새끼들아.내 보내 줘.여긴 싫어.문짝을.발로 차며.발광하는.흰.알약들.입 벌려 새꺄….'(정신병동-반짝 빛나지도 않는)

쉼표도 없고, 건너 뜀도 없는 시어들이 들숨과 날숨의 규칙성을 잃고 목구멍 깊숙이 쳐박힌다. 그녀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시인 이경림(61). 대구에 강연차 들른 그녀를 만났다. 시집 '토씨찾기'의 신기(神氣)어린 시들의 주인공이다.

그녀의 삶은 상처투성이다. 가난과 아버지와의 투쟁,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눈물겨운 고통의 강을 건너왔다. 마흔 셋에 등단했다. '문학과 비평' 봄 호에 '굴욕의 땅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을 나섰다. 29세부터 공황장애를 앓았다. 혼자서는 시장도 못 갈 정도. "거의 폐인이었죠." 10년 넘게 병원을 들락거렸다.

의식의 늪에 빠졌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과 투쟁하며 끈을 놓지 않았다. 병실에서 미친듯이 수학공식을 푼 것도 하나의 예다."밤새도록 미적분을 풀었어요.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죠." 연습장을 찢어 화장실에 붙여놓고 흐뭇하게 보기도 했다.

"루트 기호를 보면 지붕같이 생겼잖아요. 다른 식구들은 그 속에 안온하게 살고 있는데, 저만 루트밖에 비스듬히 얹힌 숫자같이 느꼈지요." 그녀는 1947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이창섭)는 대한석탄공사 기획과장이었다. 석탄 호황기에 집안 형편은 괜찮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갔다. 사상적으로 좌익이었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후 가족들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고3때까지 24번이나 이사했어요. 월세집을 전전했죠." 아버지는 1년에 반 가까이 집을 비웠다. 언제나 필요할 때마다 아버지는 그들 곁에 없었다. 뒤늦게 태어난 여동생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간 고열로 시름시름 앓더니 숨을 쉬지 않았다. 고3 여고생 언니는 두살 난 여동생의 주검을 포대기에 싸 자정 무렵 뒷산에 묻었다.

"집에 돌아오니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밤새도록 동생의 얼굴에 빗줄기가 쏟아지는 환영에 시달렸다. "아침에 비가 그쳐 가보니 어딘지 모르겠어요. 흔적도 없어요. 피부가 눈부시게 뽀얀 아이였어요. 이름도 눈 설(雪)자 설이였어요." 태어나자마자 눈처럼 녹아버린 것이다.

고려대 뒷산으로 지금은 큰 도로가 생겼다. "지금도 그 길을 가면 숨이 퍽 멎어요. 저기쯤 되었을텐데…."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원망은 극도에 달했다. "결혼도 아버지가 가장 싫어할 타입의 남자와 했어요. 평생 속상하라고, 당신도 가족 때문에 애를 먹어보라고." 그때 나이 스물하나였다.

화해할 수 없는 아버지와의 투쟁과 자기학대는 극도의 공포감과 불안을 수반하며 결국 정신적인 공황을 몰고 왔다. 거기에 가장 아끼던 남동생(이진)까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연세대 국문학과를 나와 소설을 쓰던 동생이다. 서른 아홉이었다. 사실 시도 그 동생 때문에 쓰게 됐다.

"정신병원에 면회를 와서 문예지 '문학과 비평'을 넣어줬어요."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신인공모였다. 당선작 50만 원. "병원비는 되겠다 싶어 50편을 보냈죠." '…/아 썩는 땅은 기름져 나무들 절망처럼 무성하고 그림자 더욱 검구나/그 그늘에 몸 적시며 아득한 곳 찾아 간다/그곳에 모호하게 몸 눕히고/살들 흩어지는 소리 듣고 싶어'(굴욕의 땅에서.2).

'-진(珍)에게'라는 부제를 단 '굴욕의 땅에서'는 동생에게 보내는 시다. "미친 듯이 시를 썼어요. 1년에 200여 편을 썼죠." 시를 쓰면서 차츰 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람도 만날 수 있었고, 혼자 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

"시는 구원이죠. 시를 안 썼으면 아직도 그러고 있을 거예요. 동생이 내 병을 고쳐준 셈이죠."

아버지는 시대를 잘못 만난 지식인이었다. 대구 경북고보(경북고)를 졸업했다. 좌익에 편향되면서도 평생 혼자 연구하고, 혼자 사유한 학자였다. 말년에는 경전번역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대장경 법화경 등 286종을 번역했다. 60세 때부터는 장당 1만 원의 원고료를 받았다. "한 달에 2천매씩 번역했으니 수입도 좋았죠."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그때는 자식들 형편이 모두 좋을 때다. "그게 비극이죠. 정작 필요할 때는 없고, 필요 없을 때는 있는…." 아버지가 낙향해 상주에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을 때 그녀는 형제들의 반대에도 아버지를 자신의 집에 모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석달 만에 세상을 뜨고, 어머니마저 7개월 간격으로 떠났다. 기구한 인연이다.

"죄책감이 몰려들었어요. 고개를 못 들 정도였죠. 안 오시겠다는 분을 모셔와선…." 그녀는 오십이 넘어 아버지와 화해했다. "아버지를 너무 몰랐었죠. 얼마나 큰 분을 아버지로 모셨는지…."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삶을 지탱해준 기둥이었다."고 말했다. 상처로 몸부림을 쳤지만, 그 상처가 오늘날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이 그럴까. 거부할 수 없는 피, 그녀 또한 자신에게서 아버지를 본 것은 아닐까.

산문 '사실적인 사실, 적(敵)인, 슬픈 아버지'에서 그녀는 "아버지는 원초적으로 분노였지만, 목젖이 터질 것 같은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며 "애면글면 부둥켜 안고 있던 어머니보다 한 생 미워하다 사랑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아버지가 더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라고 적고 있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약력

1947년 경북 문경군 가은면 완장리에서 출생. 유년 시절을 은성광업소 사택에서 보냄. 가은초교 졸업. 1960년 안동사범 병설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서울로 이주. 서울 문리사대부중, 창덕여고 졸업. 1988년 40세에 오규원 시인을 만나 시작에 몰두. 1989년 '문학과 비평' 봄호에 '굴욕의 땅에서' 외 9편이 김춘수 시인의 심사로 당선. 1992년 첫 시집 '토씨 찾기', 1995년'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1997년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출간. 2001년 시 소설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출간. 2004년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에서 영역판으로 출간된 contemporary Korean womans poets 'Echoing song'에 안암동외 14편 소개. 2005년, 네 번째 시집 '상자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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