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자

입력 2007-07-21 1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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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왓킨스 지음·권영주 옮김/ 아트북스 펴냄

'되도록 오래된 재료를 사용한다' '재료가 발명된 시대를 기억한다' '원작과 비슷한 새로운 작품이 발견된 것처럼 꾸밀 것!' '때와 벌레를 적절히 이용한다' '갈라진 틈을 만들자!' '거장의 습관을 활용하라!'.

이 점을 잊지 않고 꼼꼼히 작업한다면 당신도 '진짜 같은 가짜' 작품, 위작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 실력이 밑받침돼야 하지만 말이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툭 터져나오는 미술품 위작이나 모작 사건. 법률적·도덕적인 문제를 접어두고 살펴보면 일단 전문가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만한 작품을 보면 위작한 범인(혹은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여타 작가들보다 훨씬 좋은 실력이 더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1991년 있었던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둘러싼 논쟁(결국 위조범이 자신의 작품이라고 고백했음에도 여전히 공식적으로 천 화백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괴링의 소장품 중에서 발견된 베르메르 위작을 그려낸 네덜란드 화가 메이헤런의 사건은 극명한 사례이다.

지은이는 바로 미술품 위조를 소재로, 그림을 위조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평생 위작을 만들며 비교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작품을 불태워 버린 괴팍스러운 천재 판크라토프와, 그의 밑에서 그림을 배우며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해 가는 주인공(데이비드 핼리팩스)이 그 중심에 서 있다.

이들의 뛰어난 능력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시대를 뛰어넘는 명화를 지키기 위해 위작을 만들어야만 하는 운명에 내몰리게 된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게 된 주인공 핼리팩스의 심리 묘사는 이 책의 장점이다.

미국 화가로, 비록 장학금을 받고 파리에 미술 유학을 떠났지만 '성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부담감에 작업도 시작 못하는 풋내기의 모습부터, 스케치 작업을 거듭하는 동안 실수를 저지르고 난 이후 작업의 틀을 잡아가는 모습, 작업 자체에서 희열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예술을 창조하는 미술인의 삶 그대로이다.

무엇보다 본격적으로 위작을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 변화와 갈등은 훌륭하다. "베르메르의 마음 속을 무단 침입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죽은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났다는 사실도 문제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나는 그의 마음속 어두운 방들을 도둑놈처럼 살금살금 돌아다녔다."

옮긴이는 "미술품 위조라는 행위의 상세한 과정, 위조자의 심리 상태 등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것이 절정에 이르는 베르메르의 '천문학자' 위조에 주인공이 몰입하는 장면에서는 흡사 주인공의 어깨 너머로 그가 칠하는 색 하나하나, 긋는 선 하나하나를 구경하는 기분"이라고 적었다.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또는 미술인이 본다면 적잖이 놀랄 만한 수준의 서술이다.

팩션(faction: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의 묘미는 역사적 사실(fact)을 바탕으로 얼마나 사실적인 허구(fiction)를 창조해 내느냐는 점이다. "이 책에 언급된 여러 작품 중 다수가 실존하지만, 그 작품들의 역할은 전적으로 허구이다."라고 지은이는 마지막에 선언하긴 하지만, 눈앞에 그대로 펼쳐질 듯 섬세하고 세밀한 지은이의 묘사로 인해 당대 시대의 분위기를 느끼며 넘기는 책 한 장 한 장의 느낌이 너무나 가볍다.

본격적으로 사건이 전개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는 점은 아무래도 흠이다. 주인공이 파리 생활에 적응해 나가면서 겪는 것, 보는 것을 사진을 보듯 선명하게 감상하는 데 전체의 4분의 1을 쓴다는 것이 혹자에게는 낭비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472쪽. 1만 1천 원.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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