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방과후 터전'의 즐기는 방학

입력 2007-07-19 16:02:16

주부 이모(35.달서구 장기동) 씨는 이번 방학에는 초등학교 4학년인 큰 아이 공부에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단다. 욕심을 안낸 결과가 영어와 수학만 집중하기. 방학 때 한번 뒤쳐지면 학기 중에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주부 강모(37'수성구 범물동) 씨도 마찬가지. 마음 같아서는 학기 중에 학교며 학원 다니느라 지칠대로 지친 아이들을 쉬게 하고 싶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마음이 싹 사라진다고 했다. " 주위 학부모들은 학원에서 하는 여름방학 특강 신청한다고 난리법석인데 어떻게 혼자서 태연할 수 있겠어요? 아무래도 다니는 게 마음이 편하죠."

하지만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학원은 절대 보내지 않고 놀고픈 만큼 실컷 놀게 해주겠다고 결심한 부모들이 있다. 대구시 북구 국우동에 자리잡은 '평화로운 방과후 터전'을 만든 사람들. 이들은 일정액의 출자금을 모아 공동육아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취학 전 아동들을 대상으로 '노마어린이집'을, 초등학교 1~4학년을 위해서는 '평화로운 방과후 터전'을 만들었다. 지식을 주입하고 틀에 박힌 학습만을 강요하는 교육체계에 대한 대안교육 형태로 시작했다. 영어와 수학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친다.

'터전'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다녀오면 워낙 인상 깊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국우터널을 지나 북구 칠곡으로 접어든 뒤 바로 오른편 길을 따라 빠져나오면 국우동이다. 도남교회 앞을 지나 1차로의 좁은 마을 길을 통과하면 터전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칠곡 택지개발의 태풍 속에 오롯이 살아남은 도심 속 섬과 같은 마을이다.

한 차례 태풍은 비껴가면서 옛날 시골 풍경을 고스란이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개발의 질긴 손짓은 이곳을 가만 두지 않는 모양이다. 마을 곳곳에 '택지개발 반대'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500여m 남짓한 마을 길을 다 지나면 '대구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으리만치 조용한, 말 그대로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이 곳에서 아이들이 뛰놀고있다.

시골같은 풍경 한 켠에 '터전'이 자리잡고 있다. 겉보기에 어설프고 초라해 보이는 집.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그제서야 공부방임을 깨닫게 한다. 제법 널직한 가정 집을 바꿔서 공부방으로 만든 듯 하다. 아이들을 위한 각종 놀이도구(학습도구가 아니다)가 차곡차곡 쌓여있고, 방 안쪽 아이들은 선생님이 책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뭐라고 재잘재잘 떠들기도 한다.

취재 나온 기자를 위해 평소 보다 이른 시간에 어머니들이 모였다. 굳이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다싶어 바로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마음에 안들어서 이렇게 따로 터전을 만든겁니까?" 초등학교 2학년 아이를 둔 정미희(38) 씨가 답했다.

"무엇이 마음에 안든다기 보다는 어떻게 아이들이 자라기를 바라는지, 즉 아이를 키우는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이죠.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법대, 의대를 들어가고 의사, 판'검사가 된다고 하죠. 그렇다면 그 아이는 행복합니까? 물론 그게 행복인 아이도 있겠죠. 문제는 그것이 아이의 행복이라고 믿는 부모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아이에게는 물어보지도 않아요. 뒤쳐질 수 없다는 부모의 강박관념이 바로 문제입니다."

내친 김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아이가 공부를 못해도 상관없다는 겁니까?" 초등학교 3, 4학년 아이를 둔 강혜진(39) 씨는 "도대체 영어, 수학, 논술 학원 다니는 것과 공부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라고 되물었다.

"이곳 아이들은 학원 한번 가지 않아도 모두가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합니다. 공부는 하고 싶을 때 해야 합니다." 서울에 살다가 지난 3월 대구로 이사왔다는 전사라(38) 씨는 학원 강사 출신이라고 했다. "학원을 문제삼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남들이 보내니까, 우리 아이만 뒤쳐질 수 없으니까, 보내면 조금이라도 나을 것 같아서 학원을 보내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실제 서울 학원에서 아이들 수학을 가르쳤지만 제대로 수업을 듣는 학생은 10명 중에 1명도 채 안됩니다. 나머지는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냥 자리를 채우고 앉아있는 들러리인 셈이죠."

초등학교 6학년 딸을 둔 김태숙(44) 씨는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5, 6학년이면 이른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기. 아무 이유도 없이 제 방 문을 잠그고 꼭꼭 숨어버린다. 이유를 물어도 "몰라, 귀찮아. 아! 됐어."를 연발하며 엄마를 밀쳐내기 일쑤다. 이곳 터전 부모들은 이런 점에 대해서는 별 걱정을 안한다. 어려서부터 대화로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방학 계획을 물었다. 일단 방학 후 첫 주는 '무조건 놀기'. 빙상장, 수영장, 극장, 낚시터 등등을 찾아다니며 말 그대로 '코피 터질만큼'(어머니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놀아보게 하는 시간이다. 합천 자연학교에 4박 5일 캠프도 보낼 계획이다. 터전에도 방학이 있다. 2주간은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 이 시간이 끝나면 다시 노는 시간이다. 월요일에는 칠곡에 있는 '더불어 숲' 도서관을 찾고, 화요일엔 풍물을 배우고, 수요일엔 '문화 나들이' 시간으로 박물관, 극장 등을 찾아가며, 목요일엔 과학'수학 놀이, 금요일엔 요리와 공작 시간을 갖는다. 도대체 공부는 언제하는지 궁금했다.

담당교사인 오영남(41'아이들은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에 '나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씨는 "노는 게 공부 아닌가요? 실컷 놀지 못한 아이는 실컷 공부도 할 줄 모릅니다. 이곳 아이들도 자신이 원하면 영어, 수학 학원에 갑니다. 물론 부모가 못가게 말리는 경우도 있지만(웃음). 바로 옆에 자연이라는 훌륭한 학원이 있는데 굳이 어딜 갑니까?"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