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國旗 맹세문 고칠 시간에

입력 2007-07-09 11:51:02

집권 초반부터 뭣이든 옛날 것은 바꾸고 뜯어고치고 뒤지고 캐내는 데 이골이 나있던 참여정부가 이번엔 난데없이 '國旗(국기)에 대한 맹세' 내용을 뜯어고치겠다고 나섰다.(입법예고)

태극기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어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익혀 듣고 외우다시피 기억돼 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제정된 지 이미 35년이 넘었다. 이제 와서 그걸 왜 뜯어고치려 드는지 궁금해 내용을 새삼스레 살펴봤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아무리 뜯어봐도 맹세문이 잘못된 탓으로 나라에 무슨 탈이 난 기억이나, 당장 안 고치고 그냥 놔두면 나라 안보에 해를 끼치고 국가 경제를 좀먹게 하고 청년실업이 늘거나 국민의 문화적 정서를 병들게 할 것 같은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지난 35년간 태극기를 올려볼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경건히 귀 기울여 들어 왔던 보통 사람의 눈과 가슴으로는 할 일이 태산 같은 이 시기에 손봐야 할 만큼 절실하고 긴박하게 탈 잡아야 할 '건덕지'는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 유독 이 정권 사람들 눈과 가슴엔 民生(민생)이 말이 아닌 시기, 그것도 정권 말기에 국기 맹세문 고치는 일이 엄청 급박한 國政(국정) 사안이고 민생을 위한 일거리로 보이는 모양이다. 참으로 할 일 안 할 일, 급한 일 미룰 일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하긴 우리보다 80년 앞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한 미국도 맹세문을 세 번 고치긴 했다. 1892년 10월 12일, 프랜시스 벨라이와 제임스 업햄이란 두 사람이 '청소년의 친구'라는 잡지에 맹세문을 올린 것이 첫 번째 맹세문이다. 내용은 '나는 나의 국기와 (그 국기가 상징하는) 자유와 정의가 있고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국가에 대해 충성을 맹세합니다'였다. 그 뒤 1923년 6월 '나의 국기(My flag)'가 '합중국국기(The flag of United States)'로 고쳐지고 다시 1924년 United States 뒤에 'of America'를 덧붙였다. 그 뒤 다시 한 번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때 '신(하느님)의 가호 아래'라는 뜻의 'Under God' 구절이 추가돼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맹세문에 대한 반발이나 異見(이견)도 있긴 했다. 그러나 우리처럼 '조국과 민족'을 세계화에 안 맞다며 빼자거나 '몸과 마음을 바쳐'를 애국 충성을 강요한다는 황당한 이유로 없애자는 식은 아니었다. 단지 Under God(하느님의 가호 아래)이란 문구가 비종교인들에게는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이견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반론조차도 무시되고 오늘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결국 이번 맹세문 고치기는 반풍수 묘터 옮기는 꼴이 됐다.

결론적인 이유는 새로 바꾸겠다는 맹세문의 핵심 문구가 미국의 맹세문을 그대로 베끼다시피 모방했기 때문이다. '조국과 민족' 대신 바꿔 넣은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 '자유와 정의가 있고 하나의 나라인 미합중국'과 빼닮아서다. 요란스레 '맹세문 검토 위원회'까지 만들어가며 뜯어고친 결과가 고작 남의 나라, 그것도 이 정권이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있는 미국의 맹세문 베끼기냐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정부는 '조국과 민족' 문구를 그냥 두면 폐쇄적이고 배타적 민족주의가 연상돼 세계화에 안 어울린다지만 國歌(국가) 가사에도 '민족'과 '조국' 같은 민족주의적 문구를 넣고 있는 세계화된 나라는 숱하게 많다. '조국을 찬양하리'(브라질), '꽃피라 빛나는 조국'(독일), '스웨덴 그대 조국이여'(스웨덴), '조국의 신이여'(스위스 1961년 이전), '찬미하라 조국을'(핀란드), '일어서라 조국을 위해'(포르투갈), '나가라 조국의 아들'(프랑스)…….

정작 이 정권이 해야 할 맹세는 따로 있다. '나는 국기 맹세문 고칠 시간에 경제와 민생 살리는 일에나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金 廷 吉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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