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 지면에 닿기 전까지는

입력 2007-07-07 08:57:19

홍순탁 황인성 정석부 이영희 손의락 장상수 이정남 오승철 박상건 최상덕 김현준 정우균 문대호 백승하 유영민 박효관 노태용 서인호 김동해 최상대 장준호 이윤호 배옥희 원순금 전미애 송정숙 강금환 이영분 이명희 김정미 임옥희 정진아 강정희…

모두 탁구에 홀린(?) 사람들로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이들의 이름이다. 하루도 탁구를 치지 않으면 무언가 허전해서 참기 힘들어한다. 운전을 하면서 다른 목적지로 향해 가다가도 무의식중에 핸들이 탁구장이 있는 쪽으로 꺾이는 것을 적어도 한두 번쯤은 겪어 본 일이 있는 이들이다. 중독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이 글머리에 굳이 여러 이름을 적은 것은 이들이 늘 나에게 웃음을 주기 때문이다. 이따금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길에 평생회원으로 있는 동네탁구장을 찾곤 한다. 철에 관계없이 늘 열기로 들끓고 있다. 사람 사는 맛이 나는 현장이다. 큰 소리로 외치며 라켓을 휘두르는 모습에서 삶의 활력을 느낀다. 공이 잘 들어가도 웃고, 뜻밖의 실수로 점수를 잃어도 모두들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길게는 10년, 짧게는 3, 4년을 같이 운동한 이들이어서 그들의 표정만 보아도 그날의 컨디션을 알아차리게 된다. 나이도 30대 초반에서 60대 후반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여성들은 대부분 전업 주부들이다. 남성들은 직업들이 다양하다. 물론 운동을 하면서 각자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주된 목적이 탁구 치는 일이므로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많이 한다.

다소 지엽적인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동네 곳곳마다 탁구장이 더 많이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30년 가까이 탁구를 즐기면서 이만한 건전한 운동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중·고등학교 체육교과 교육과정에 탁구가 필수 이수과정으로 선정되었으면 좋겠다.

게으른 사람은 탁구를 즐기기 힘들다. 연신 허리를 굽혀 공을 줍거나, 끝없이 재빠르게 굴러가는 공을 집으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순간도 공에서 눈길을 뗄 수 없고 떼어서도 안 되기 때문에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야 한다. 그래서 탁구를 치면 시력이 좋아진다는 말도 있다.

운동을 하다 보면 승부에 욕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대등한 실력을 가진 이에게 연패를 당할 때 때로 은근히 화가 나서 자신을 닦달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다니는 탁구장의 분위기는 그렇지가 않다. 승부에 집착하기보다 대부분 과정 그 자체를 즐긴다. 요즘은 한 세트가 11점 경기여서 빠르게 진행된다.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다가도 그 세트를 내주는 일도 허다하다.

그래서 탁구를 치면서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다. 연이어 3점을 뺏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일이다. 승부를 떠나 긴장의 끈을 다잡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물론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렇지만 생각을 하면서 경기를 하면 어려운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다. 바둑에서 조치훈 9단 같은 이들이 2연패로 벼랑 끝에 내몰렸다가 3연승을 하여 타이틀을 용케 방어하듯이, 보통 5판 3선승 게임을 하는데 먼저 2패를 당한 뒤 내리 3승을 하는 경우도 적잖다.

나는 이 글에서 힘주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공이 '지면에 닿기 전까지'는 끝까지 온몸과 눈으로 공을 좇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경기할 때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아주 강하게 때려놓고는 '이 정도면 놓치겠지'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상대방 선수가 뜻밖에 공을 받아 올리는 바람에 역공을 당해 점수를 잃는 경우가 있다.

구기운동은 흐름을 탄다. 한번 잘 포착된 분위기는 큰 점수차를 극복하게 하고 종내는 승리를 안겨 주기도 한다. 이것은 우연히 이루지는 일이 아니다. 한 팀 선수들이 혼연일체가 되거나, 경기에 나선 선수가 놀라운 집중력을 보일 때 가능한 일이다.

공이 떨어져 땅에 닿기 전까지는 승부가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도 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끝까지 목표물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그 상황을 지킬 때 성취의 길은 열린다. 만만찮은 세상살이에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세우는 일은 공이 '지면에 닿기 전까지'는 긴장의 고삐를 다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여름을 맞아 유난히 더위에 약한 내가 나를 채찍질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정환(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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