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6·25와 6·15 그리고 기억의 정치

입력 2007-07-05 07:57:21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통일이나 북한 관련 책들이 그나마 관심을 끄는 시기가 6월이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나 중·고생들이 6·25와 관련된 숙제를 하기 위해서 책을 구입하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도 여전히 6월은 북한 및 통일관련 서적의 성수기인데 6·25에 더하여 2000년 6·15가 또 다른 배경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북한관련 책이 조금은 더 읽힌다는 사실이 바람직한 것 같으면서도, 그 이유가 민족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착잡하였지만, 요즈음은 그래도 민족의 미래를 지향하는 6·15가 또 다른 배경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나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일시적이나마 6월의 북한 관련 서적 판매에 도움을 주는 6·25와 6·15 사이에는 1950년과 2000년의 시간적 간극보다 더 큰 거리감이 존재한다. 6·25가 민족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 전쟁이었다면, 6·15는 민족의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남북한 최고지도자 간의 정상회담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들이 대부분 그렇듯 6·25나 6·15가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서 어떤 역사적 교훈을 얻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6·25의 경우는 '상기하자'라는 구호 아래 북한의 침략성, 김일성 집단의 무자비함, 사회주의에 대한 증오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는가 하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불과 3년에 걸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00만~400만 명의 사람이 죽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사건으로 생각되기보다는 증오를 확대하고, 그래서 새롭고 더 큰 전쟁을 지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6·25와 달리 6·15의 경우는 서로 반대되는 생각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남북 간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야심과 북한의 정교한 전략의 결합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쪽 입장에 서 있건 남북관계의 변화나 그 속에 살고 있는 남북한 보통사람들의 변화보다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의 공과 여부나 김대중 정부의 이념 평가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6·15를 통하여 무엇을 얻었고, 무엇이 부족했고,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관심은 뒷전에 밀리고 있다는 말이다.

6·15나 6·25가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가 분명히 다르지만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과거지향적이고, 민족구성원의 삶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정략적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냉전적 사고가 단순히 '안보'를 굳건히 하거나 국가적 '정체성'을 보존하는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처를 치료하고자 하는 정상적 사고가 아닌 상처를 끊임없이 덧내고자 하는 비정상적 사고를 조장하고,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공동체의식이 아닌 투쟁과 갈등의 분열의식을 자극하고, 평화로운 삶이 아닌 전투적 삶의 확산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불행한 일상과 불안정한 심리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의도적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정한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구현하기 위해서 역사적 사건의 기억을 일정하게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6·15와 6·25의 기억의 정치는 누가 주도하고 있는 것이고, 그 결과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 올바른 기억과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서도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우영(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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