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누군가가 문화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들을 때면 내 권총으로 손이 간다.'라는 '헤르만 괴링'의 말을 적당히 무시하더라도, 디지털문화와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근래 몇 년 사이에 우리 주변에서 하나의 중독성을 지니고 시각문화 변화의 주축을 이루며 번지고 있는 것이 손으로 쓴 글씨 즉, '캘리그래피(calligraphy)'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이 말은 '아름다운(Calli)' '글씨(graphy)'라는 뜻인데 '손멋글씨' '능필' '붓글씨체'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캘리그래피의 영향은 광고 등 인쇄 출판 디자인뿐만이 아니라 트렌드의 최선두에 있는 웹과 디지털 영상매체까지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캘리그래피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시기는 밀레니엄을 기점으로 편집디자인·광고카피·영화타이틀· 북커버·폰트·생활제품 등으로 폭넓게 확산되고 있으며 인테리어·환경디자인에 이어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의 패션쇼에서 보여준 '장사익의 편지글씨'를 응용한 패션과의 크로스오버는 캘리그래피가 문화적 화두에 이른 결과들이다.
이러한 손글씨가 근래에 와서 주목을 받게 된 바탕에는 물론 시각문화의 패러다임 변화가 디지털의 차가운 쿨미디어(cool media)에 영향을 받아, 보다 사람다운 감성을 가지고 매체에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가 그 근본적인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필자는 디지털 매트릭스에서 만들어낸 감성의 몸짓으로 글씨를 밥알 씹듯이 눅눅한 국물로 쓴 글씨가 영화 '웰컴투동막골'의 타이틀 손글씨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글씨는 영화를 이해하며 빚어낸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현대인의 디지털문화에 대한 반감성적 저항의 메시지라 할 수 있으며, 디지털홍수의 시대에 아날로그의 감성이 보다 크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성 회복, 느림의 철학, 슬로푸드, 추억 비즈니스 등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이러한 열화현상은 출판계에서도 그 영향이 적지 않으며 책제목과 디자인이 성공의 80%라는 말이 있듯이 친화적인 손글씨 제목은 디지털 사용자들에게 한 번 더 존재가치를 상승시킨다. 앞으로 글꼴디자인에서도 폰트는 더 확장되고 다양하며, 섬세하게 표현될 것이다.
더불어 인간의 감성이 느껴지고 쓰는 사람의 숨결이 담긴 손글씨는 디자이너에 의해서 더 다양한 모습으로 대중문화 폐부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우리의 시각문화를 더욱더 아름답게 만들 것이며, 디지털의 패스트푸드에서 유일하게 디자인의 감성과 인간성을 회복시켜주는 대안이 캘리그래피에 있다.
박병철 (대구대 조형예술대학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