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나선다. 향교 앞 도로가 휴일이라 더 한적하다. 한껏 볼 부은 막내가 아내 손에 끌리듯 따라온다. 해가 중천인데 늦잠 자는 형과 누나는 그냥 두고, 왜? 저만 억지로 데리고 가느냐는 항의다. 몇 발자국 앞서 걷던 내게 아내가 묻는다. 당신도 과거에 어머님 손에 이렇게 매달려 가 본 적이 있느냐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피식 웃음이 난다.
십 분도 안 될 거리를 실랑이하며 반 시간도 더 끌었다. 슬슬 부아가 고개를 쳐들 때 막내가 문구점을 향해 간다. 떼쓰는 아들과 달래는 엄마 사이에 어느 정도 흥정이 이루어졌나 보다. 대구초등 낮은 창살 담장 틈으로 얼굴을 내민 장미송이들이 바람결에 흔들린다.
한참을 기다렸다. 제 맘에 들었을 무엇을 사오면서도 끌끌 혀를 차듯 땅을 차는 모습과 입술 삐쭉 내민 표정이 못내 거슬린다. '아빠 화 많이 났어!' 힘이 들어간 내 눈과 순간 마주쳤다. 곧바로 시선을 내린다. 앞서 성큼성큼 걸었다.
온갖 상념이 겹친다. 네댓 살 되던 이맘때쯤인가. 새참 준비를 마친 어머니는 집에 남도록 나를 달랬다. 타는 땡볕에 뒷재 너머 논밭까지는 제법 멀어서다. 자다 깬 한낮 적막 공포에 질려 자지러지게 울었던 기억이 있었다. 고개를 저었다. 어떤 말로도 어머니는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집을 나와 왼쪽 길로 접어드는 어머니를 저만큼 두고 찔끔거리면서 뒤따랐다. 풀쐐기처럼 목덜미를 마구 쏘아대는 햇살, 眞空(진공) 속 無音(무음)의 몽롱한 四圍(사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누런 보리밭이 깔끄럽게 강가의 과수원까지 펼쳐져 있다.
자드락길 따라 이어진 못 둑으로 어머니 모습이 사라졌다. 밭이랑에서 금방 늑대라도 나타날 것 같았다. 뛰는 발걸음 소리보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꽃뱀 한 마리가 깜장 고무신 발등 위를 스쳤다. 닭살 소름이 돋았고 머리칼이 쭈뼛 서더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새참 소쿠리를 내려놓고 달려온 어머니가 깔딱거리는 나를 번쩍 들어올려 꼬옥 안고는 등을 토닥였다. 미소 띤 잔잔한 눈빛이 '거 봐, 집에 있으라 안 카드나'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 손에 매달려 종종걸음을 쳤다. 그 참에 내 울음은 어디론가 달아나고 없었다.
"더 고집 피우면 정말 종아리 맞는다?" 말꼬리를 추어올리며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다시 앞서 걷다가 힐끔 뒤돌아봤다. 아무 말 없이 제 엄마 손을 잡고 따라온다. '어르신네 병동'에 들자 표정관리부터 한다. 내가 그랬듯 손자 귀여워하는 줄 저도 이미 알고 있다.
끙끙대며 동정을 유도한다. "이수야, 와카노?" "우리 수야, 뭐가 불만이고?" 힘겹게 한두 마디 이어 붙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물음에는 대꾸도 않으면서 틈틈이 내 표정만 살핀다. 아내와 하나씩 휠체어를 밀고 병원 앞 인도로 나왔다.
햇볕 다사로운 곳에 나란히 세웠다. 타다 남은 재처럼 이제는 모두가 허상의 기억으로 존재하는 어릴 제 그날의 티 없이 맑은 하늘이다. 가로수 신록이 싱그럽다. 하지만, 세월처럼 흘러가는 차량을 멍하니 바라볼 뿐, 구순(九旬)의 아버지 어머니는 말씀이 없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종종걸음치던 그날의 나는 어느새 머리 희끗한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다. 세월의 무게에 눌려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아버지 어머니. 조붓한 그 길이 오늘따라 몹시도 그립다. 어깨 위로 쏟아지던 뙤약볕도 이젠 한 조각 그리움이다.
돌아가는 길, 석양 비낀 건널목. 훗날 내 아이들도 따라 밟으리라. 삶을 다할 때, 목숨조차 나비 날갯짓처럼 엷어지면 어딘지도 모르고 왔던 길로 하릴없이 가야 한다. 허공을 향하여 멀뚱거리는 막내의 볼을 '톡-' 건드렸다.
"수야, 어디까지 고집을 피워야 되는 줄 이제 알겠제?" 감금당했던 막내의 긴장 고리를 풀어주었다. 싸하니 번지는 웃음이 박꽃보다 맑고 희다. 생기 넘치는 막내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넌다. 아이의 손에 따스한 어머니의 손길이 머문다.
남해진(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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