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죽인채 낡은 문 열면 눈부신 꽃상여
예전 시골에서 아이들끼리 곧잘 하던 담력 테스트. 한밤중 상엿집에 갔다오는 것도 단골 메뉴였다. 상여에 붙어있는 종이꽃을 떼어와야 했는데 제법 용기가 필요했다. 아이들도 사내랍시고 겁없는 척 덤벼들지만 제대로 갔다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귀신은 무슨…." 마음 졸여가며 상엿집 가까이는 갔지만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도 놀라 내빼기 일쑤였다.
'곳집'이라 불리는 상엿집은 마을 외딴 곳에 있다. 초상이 났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용구를 쓰려고 드나들지만 평소에는 누구 하나 얼씬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상엿집이 있었지만 이제는 점차 사라져가는 추억의 장소다.
◆상여 매는 곳도 많지 않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지난 5월 타계한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 살던 토담집 바로 옆에 상엿집이 있다. 벽돌로 얼키설키 쌓아놓은 1평 남짓한 작은 집이다. 문이 반쯤 열려 있고 먼지가 가득 쌓여있어 오랫동안 방치돼 있는 듯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사용하지 않은 지 10년 가까이 됐다고 한다. "요즘 병원에서 다 해주는데요, 상여 맬 사람이 없어요."
일직면 망호2리에는 큼직하게 지어놓은 상엿집이 있다. 19세기 초에 만든 집인데 지붕은 기와를 올렸고 벽은 돌과 흙으로 튼튼하게 지어놓았다. 전국에서 몇 남지 않은 건물이어서 경북 문화재자료 제384호로 등록돼 있다. 재미있는 것은 상엿집이 마을 앞길에 턱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상엿집에서 불과 20여m 떨어진 곳에 민가 몇 채가 있었다. 주민 남중근(71) 씨는 "예전엔 기와가 떨어지고 벽도 일부 허물어져 그야말로 귀신이 나올 것 같았다."며 "얼마 전 시청에서 기와를 새로 올리고 보수해 깨끗해졌다."고 했다. 상엿집 안에는 틀, 혼가마, 소반, 만장 등 각종 용구가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은 지 10년 정도 됐다고 한다. 마을에 상여를 맬 만한 젊은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란다.
◆상여꾼은 8명이 고작…
지난 22일 오전 9시 경북 상주시 외남면 지사리에서 열린 차무진 전 김천교육장의 장례식.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선소리꾼과 상여꾼의 소리가 이어졌다.
'어~하, 어~하/어~허이, 어~허이, 어~넘자 어~하/간다, 간다, 나는 간다./어~허이, 어~허이, 어~넘자, 어~하/북망산천 찾아간다/어~허이, 어~허이, 어~넘자 어~하/이제 가면 언제 오나/어~허이, 어~허이, 어~넘자 어~하.'
상여꾼은 모두 8명. 젊은 사람은 보이지 않고 전부 60대 이상 노인이었다. 선소리꾼 김남술(67) 씨는 "20년 전만 해도 24명이 상여를 메면 선소리꾼이 상여 위에 걸터앉아 선소리를 했다."며 "요즘에는 상여꾼 8명을 맞추기 어려운 마을도 많다."고 했다. 상주 차영규 씨는 "선친의 마지막 길을 아름답게 보내 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해 꽃상여를 했다."고 말했다.
취재팀은 1주일 넘게 수소문 끝에 상여 메는 장례식을 겨우 취재할 수 있었다. 그만큼 상여 메는 장례식이 드물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선소리꾼이 있었지만 이제는 한 시·군에 고작 몇 명에 불과할 정도로 적다. 일부 마을에서는 선소리꾼이 없어 녹음된 선소리를 틀기도 한다. 24명의 상여꾼들이 상여를 멘 채 "붙이고, 붙이고~."를 외치며 폭 20cm도 되지 않는 외나무 다리나 논두렁길을 건너가던 장면은 이젠 볼 수 없다. 의성군 금성면 탑리꽃상여 대표 김정환(55) 씨는 "시신을 화장하는 장례식이 늘어나면서 꽃상여를 찾는 사람이 줄고 있다."고 말했다.
10년 후쯤이면 상여 메는 장면도 축제 때나 한 번쯤 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을 사람들끼리 돕고 사는 상부상조의 풍속도 함께 없어지지 않겠는가.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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