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의 미국 대사관에 들러 비자신청을 한 일이 있었다. 내가 갔을 때 대사관 밖의 도로가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족히 200여 명이 되어 보이는 기다란 줄이 늘어져 시간이 좀 바빴던 나는 혹 강의할 시간에 늦어질까 봐 내심 걱정을 하고 뒤에 가 줄을 섰다.
오후 2시 반쯤이었는데 내 뒤에도 늦게 온 사람들이 뒤따라 와 줄은 더욱 길어지고 있었다. 그때 인상이 매우 온화하고 점잖아 보이는 7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내게 와 말을 걸었다. "스님 멀리 지방에서 올라오셨습니까?"
"예, 경북 영천에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스님을 앞줄에 좀 세워 드려야겠다."면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고는 나를 줄 앞쪽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나는 이분이 대사관에 근무하는 사람인가 하고 여기며 내게 베풀어 주는 호의에 무척 감사하면서 따라갔다.
이분은 나를 접수창구 바로 앞까지 데리고 가 앞에 서 있던 젊은 분에게 "이 스님이 급한 사정이 있으니 양해를 좀 해 주시오." 하고 앞에 세워 이내 서류를 접수하도록 해 주었다. 어찌나 고마운지 기분이 무척 좋아 서류를 막 접수하려 하는데 이 할아버지가 잠깐 보자면서 슬며시 내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스님, 내게 점심값을 좀 주시오." 하는 것이었다. 순간 지금까지의 호의에 고마워했던 마음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씁쓸해지는 기분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나이 많은 분이라 할 수 없이 식사비라도 몇 푼 드리자는 생각에 살며시 돈 2만 원을 손에 쥐여 주고 말았다.
이날의 일은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겼다. 물론 줄을 서 기다리지 않고 차례를 어긴 나 자신의 불찰도 반성이 되었고, 또 호의 뒤에 숨어 있는 어떤 노림수 같은 것이 느껴져 '남이 내게 베풀어 주는 호의도 의심을 해야겠구나.' 하는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은 길을 묻는 사람에게 손가락을 들어 친절히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을 손가락으로 보시하는 것이라 했는데 세상이 점점 돈에 질곡되어 간다면 길을 묻는 사람에게도 돈을 받고 길을 가르쳐 줄 것인가? 세상인심이 돈을 떠나 순수한 그대로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순수한 마음 그대로를 착하게 쓰면 복을 짓는 것이고, 노림수나 암수를 가지고 거짓된 마음을 잘못 쓰면 감복을 하는 일이 된다. 마음 한 번 잘 쓰면 복이 돌아오고 마음 한 번 잘못 쓰면 복이 떠난다.
지안 스님(은해사 승가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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