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있는 길)모항①-안도현의 <모항으로 가는 길>

입력 2007-06-19 07:59:27

죽음을 생각해도 죄스럽지 않는 바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변산으로 들어섰다. 하늘은 온통 회색으로 짙어져 있었다. 서해에는 배가 뜨지 못한다지? 배들은 온통 작은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동해 바다가 시원하고 남해 바다가 정겹다면 서해 바다는 다소 쓸쓸했다. 곰소항을 지났다. 항구 북쪽으로는 넓은 천일염전이 펼쳐져 있는데, 반듯하게 정리된 염전과 수북이 쌓인 소금더미가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바다를 보면서 얼마를 달렸을까? 차창으로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산에 내린 눈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눈이 내린다는 기상예보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눈발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발, 그렇다. 지금 눈이 내리고 있는 거다. 내변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눈은 서해바다를 적시고 있었다. 4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비로소 여행이란,/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안도현, 부분)

4시, 숙소인 모항 레저타운에 도착했다. 변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여기에 숙소를 정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 기행단의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은 모항 해수욕장을 계속 공격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단지 대자연의 위대함에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다.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럽다는 표현이 가슴에 와 닿았다. 모항은 그랬다. 분명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을 잘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자 이미 모항은 내 몸속에 들어와 있었다. 분명히 모항이라는 이름을 지닌 항구가 거기 있었다. 해가 떴다가 다시 그 자리에 해가 지는 곳, 시작과 끝·삶과 죽음·낮과 밤이 공존하는 곳, 밀물과 썰물이 공존하는 곳,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곳.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 두고/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안도현, 부분)

신기한 일이다. 하늘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낯선 이들의 방문을 환영이라도 하듯이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 한 편에서는 보름을 갓 지난 둥근 달이 구름 사이로 이따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런 상황도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내변산 너머에서 눈송이가 날려오는데 모항은 달빛으로 가득했다. 밀려나간 바닷물이 만든 금빛 백사장엔 달빛과 눈빛이 조화롭게 빛나고 있었다.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이 실감나는 아름다움이었다. 바람에 날리는 눈발에 어디선가 동백꽃이 떨어지고 있으리란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바다 소리와 달빛에 취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하룻밤이 지났다. 숙소의 창이 희끄무레 밝아올 즈음 일출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모항은 정말 신기한 곳이다. 일출과 일몰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갑작스런 눈으로 인해 일몰은 보지 못했지만 모항의 일출 또한 장관이었다. 아직 완전히 걷히지 못한 구름으로 인해 바다에서 오르는 해는 보지 못했지만 구름 사이에서 장엄하게 떠오른 태양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급하게 세수를 하고 유명한 백합죽으로 아침을 먹은 다음 내소사로 향했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 안도현의

안도현은 사람 냄새가 나는 시인이다. 2004년에 나온 시집 은 일상의 낮은 곳에서 출발하여 평범하지 않은 삶에 대한 성찰에 이르고 있다. 그의 시는 무엇이든 가볍고 헤픈 시대에 누구라 할 것이 없이 마음의 정처를 잃고 표류하는 사람들을 질긴 사랑과 연민의 힘으로 당기는 동아줄 같은 느낌이 든다. '서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시에다 삶을 밀착시키고 삶에다 시를 밀착시키는 일, 그리하여 시와 삶이 궁극적으로 완전한 하나가 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거의 하나에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그 둥글디둥근 꿈"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이 시집에서 시인은 추상적이거나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을 쉽고 친근한 일상언어로 들려주는 데서 출발한다. 시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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