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0℃를 오르내리는 아스팔트 위로 뜨거운 함성의 기억을 간직한 6월이다. 개망초 지천으로 핀 앞산과 팔공산 자락엔 아득한 밤꽃냄새를 뚫고 소쩍새와 뻐꾸기가 밤과 낮을 번갈아 울어 오디와 산딸기는 검고 붉게 익어 간다. 들판엔 굵은 양파와 마늘이 햇볕을 쬐느라 늘어져 있고….
20년 전 오늘도 산과 들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익히고 수확을 하느라 분주했으리라. 반월당에서 남문시장으로 이어진 시위대열에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직격탄이다, 도망 가" 하는 소리에 뒤로 돌아 일제히 오르막길을 숨 가쁘게 뛰었다.
가장 가까운 골목길로 뛰어들어가다 나는 그만 다른 사람의 발에 걸려 함께 손을 잡고 뛰던 친구의 손을 놓쳐버리고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의 아득함과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장면은, 내 기억 속에 플래시백으로 떠오르는 6월의 풍경이다. 깨진 무릎의 쓰라림과 매운 눈물과 함께….
지금 대구는 6월 항쟁을 되새기며 현실을 조명하고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지 가늠하느라 분주하다. 유명인사들, 지식인들의 초청강연이 날마다 열리고, 역사의 조명,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숙고하고….
지난 8일 대구사회연구소가 창립 15주년을 맞아 '지역과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했다. 그 자리를 빌려 '앎은 용서와 교제에 이르면서 완성된다. 이해한다는 것은 용서한다는 것이고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소통의 맥락 짜기를 하는 것'이라고 김민남 선생님은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식인은 '목 대놓고 설치는 저돌성을 지닌 정신적 기개가 있는' 존재이며 지식인의 역할은 '뭇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고 모범이 되는 것'이라 했다. 지식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은 미래를 꿈꾸게 한다. 이해와 소통의 맥락 짜기는 '부정의 언어'가 아닌 '긍정의 언어'로 생성되는 것이리라.
2005년 9월 24일 주성영 의원의 '국회 국정감사 기간 중 술자리 파문'을 문제 삼아 대구시민단체가 낸 성명서에 대해 주성영 의원은 대구여성회 사무국장 개인을 상대로 형사 고발과 2억의 손해배상청구를 했었다.
지난주 수요일 형사 항소심에서 허위사실 유포와 관련해서는 혐의가 없지만 사실 직시와 관련해서는 주성영 의원에게 명예를 훼손한 결과가 일정 정도 있다는 취지의 70만 원 벌금형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또 민사상으로는 500만 원을 손해배상하라는 판결을 같은 날 내렸다.
판결만 보면 마치 주성영 의원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피해자이며, 반성을 촉구했던 시민단체가 가해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성영 의원이 '술자리 사건'에서 아무런 잘못이 없다거나, 그날의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의 진실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법의 판단과 상관없이 이 사건은 뭇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음으로 해서 역사가 될 것이다.
작년 6월 대구의 지식인들과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은 법률지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백의 사람들이 마음과 정성을 모았고, 1천에 이르는 사람들이 탄원서를 올렸다. 피고소된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시민운동 자체가 오랜 재판과정을 겪으면서 많은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입었다.
그 지루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연대의 힘을 보았으며, 무엇보다도 그동안 국정감사 기간 중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감사기관과 피감기관의 술자리와 같은 잘못된 관행들을 바꾸어 놓는 데 일조를 했다.
우리 사회를 조금씩이라도 바꾸기 위해서는 '마음의 피'를 흘리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마음의 피'로 우리가 정화되고 그 누군가가 바로 뭇사람들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리라.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던 역사 속의 모든 그녀와 그들에게 깊은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
20년 전 그날처럼 간밤에도 모내기를 하려고 가두어 둔 물속에서 개구리와 맹꽁이 울음소리 별들만큼 무수하고… 오디는 달게 익었을 것이다.
이은주(문화평론가·대구여성회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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