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안면도 황도의 앞바다를 보는 신근호(63·영남이공대 교수) 원장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장장 10년이 넘게 걸린 작업이 이제 막 끝난 것이다. 이날은 티베트의 한국동포 박준의 유해가 안장된 날이다.
"왜, 이제 왔어!"11년 전 그 말을 잊을 수 없었다. 당시 그는 티베트 라사의 시짱(西藏)대학에 고급방문학자로 있을 때였다. 일제 말기 티베트에 순례 왔던 3명의 스님을 추적하던 중 라사의 유일한 조선족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박 씨 성을 가진 5명의 남매는 오래전부터 신 원장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겼다. 그리고 이해 2월 93세로 사망한 아버지(박준의)의 유골이 든 상자를 내놓고, 기구한 사연을 눈물로 하소연했다.
1900년경 만주에 왔다가 9세에 고아가 되고, 중국군에 들어갔다가 티베트까지 흘러들어와 온갖 고초를 겪다가 죽으면서도 고향을 잊지 못해 "압록강에 뿌려주면 고향에 흘러들어갈 것"이라는 유언을 남긴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이날 이후 그는 박준의라는 노인의 유해를 고향에 안장하는 일을 시작한다. 까다로운 중국 기관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유족의 호적도 조선족으로 변경하고, 수소문 끝에 고향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날 안장을 끝낸 것이다.
"어떤 그런 인연이 있나 싶어요. 아마 박 노인도 복이 많은 노인이었던 모양입니다."
운명적으로 박 노인을 만난 것처럼, 신 원장에게 티베트는 '운명의 땅'이다.
그는 국내 유일의 티베트통(通)이다. 몇 년 전 문화관광부에서 티베트와 문화교류를 위해 중국 정부에 질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중국은 "대구에 있는 신근호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국가 대 국가의 외교에 '신근호'라는 개인이 나와 한국정부가 혼란스러웠다는 후문이다. 그만큼 중국에서는 그를 유일한 한국 통로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난 10여 년간 20여 회 티베트를 방문했다. 한 번도 가기 어려운 길을 그는 왜 그렇게 힘든 길을 택했을까.
"모르겠어요. 왜 그리 티베트가 좋은지. 처음 땅을 밟았을 때도 실실 웃음만 나왔어요."지난 95년 라사 공항에 내려 포탈라 궁 꼭대기를 처음 본 날 "아, 여기가 티베트구나!"라고 실감이 났다.
그는 10여 년간 유가와 불경을 연구했다. 그러면서 티베트의 영혼과 불교의 원류에 매력을 느꼈다. 하인리히 하러의 '티베트에서의 7년'을 탐독하고, 갖가지 이래저래 도상여행을 하며 티베트행을 기다렸다.
지난 95년 티베트 자치구 등산협회의 초청으로 첫 방문하고, 이듬해 아예 시짱(西藏)대학에 고급방문학자 자격으로 들어갔다. "당시 외국인 학자로 1년 6개월가량 티베트에 머무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가톨릭대 윤수홍 교수를 비롯해 16명과 함께 한·티베트 문화원 발기 모임을 가졌다. 1999년 사단법인으로 인가 받아, 한국 유일의 티베트 문화원으로 키워냈다.
70년대 말 긴급조치로 해직당하기도 한 신 원장은 한때 '잘나가는' 현대미술 작가였다. 70년대 이강소 김기동 변종건 등과 함께 대구에서 현대미술을 이끈 인물이었다. 그래서 지인들은 "계속 미술했으면 돈 도 잘 벌고 이름도 날렸을 텐데···."라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미친놈이란 소리도 많이 듣습니다." 지금은 티베트연구의 대가로 자리매김했지만, 그동안 힘든 일도 많았다. 제약이 심한 중국 정부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는 재정적인 문제다. 그는 수억 원의 개인돈을 넣었다. "그래도 뜻 있는 이들이 십시일반 도와줘 이제까지 끌어왔습니다."
10여 년 달려오면서 "줄에서 비켜서고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것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으로 승격시키는 일이 당면과제다. 그 중에 하나가 한국에서 국제티베트학회를 결성해 불모지나 다름없는 티베트학의 기초를 정립하는 일이다.
티베트는 무한한 영혼의 땅이다. 그러나 아직은 쉽게 열리지 않는 곳이다. 신 원장은 그 땅에 핵심 통로를 만들고,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려고 하고 있다. 그는 한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한국인인 것이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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