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현충일 아침이었다. 아파트 단지 안을 거닐다 망연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국기를 게양한 가구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10%가 되질 않았고, 그 중 弔旗(조기))가 아닌 경우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산책 삼아 인근 동네도 둘러보았지만, 아파트든 개인주택이든 상황은 비슷했다.
다음날 게재된 신문 기사 한 토막에선 아예 충격을 받았다. 조기 게양을 하지 않은 관공서도 상당수 있었다는 것이다. 격세지감에서 오는 씁쓸한 감회를 누를 길이 없었다. 범국민적 국기 게양에 대해 혹자는 극우적 국가주의의 잔재 혹은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강요된 애국심의 부산물로 치부하기도 한다.
게다가 오늘날은 선진국일수록 그런 의식이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국기의 존엄성과 가치관도 희박해져 간다고 주장한다. 일부 외국의 경우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이미 개인주의가 몸에 밴 서구의 젊은이들은 국기를 패션화하여 의상의 무늬로, 액세서리로 활용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 같은 추세에 따라 우리도 국기 게양은 개개인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억측이며 궤변이 아닐까. 왜 부정적인 과거사와 결부시켜 순수한 본질마저 매도하는가. '자율'의 사전적 의미까지 언급하진 않더라도, '국기 게양을 하건 말건 상관 말라'는 식의 사고는 진정한 자율이 아니다.
자율성이란 인간 본연의 윤리적·도덕적 책무와도 연관된다. 외국의 것을 모방하기에 앞서 '나'보다 '우리'의 정체성을 먼저 인식한다면, 그 당위성은 더욱 선명해진다. 더구나 다른 법정 공휴일은 차치하고라도 현충일 같은 날 만큼은 달리 생각할 수는 없을까?
현충일이 무슨 날인가. 말 그대로 호국영령과 순국선열들을 추념하는 날이다. 그런데 그저 '쉬는 날' 정도로만 알고 하루를 보내는 한국인이 의외로 많은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국난의 시기, 시류에 영합한 지혜로운(?) 처세술로 富(부))를 축적한 이들과 그 후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양지에서 풍요한 삶을 누리고 있지만, '나'를 버리고 '우리'를 위해 살신성인한 분들의 유족들은 대부분 회한과 소외의 암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이다.
우리가 사사로이 그분들께 보답할 실천 방법이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가장 쉬운 일이 弔旗(조기)) 한번 달아서 '감사'와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허울 좋은 자율의 결과가 고작 厚顔無恥(후안무치))한 무관심이어서야 어디 그것을 '자율'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불손이며, 背恩忘德(배은망덕)이 아닐지….
아무리 물질만능주의 풍조에 휩쓸려 '나'의 물욕 채우기에만 급급한, 그래서 집단 이기주의로 병들어가고 있는 시대이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혹독했던 일제강점기, 수많은 의사들과 열사들이 죽음 앞에서도 만방에 알리고자 몸부림쳤던 태극기!
동족상잔의 6·25 전쟁 때,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애국용사들이 목숨을 산화하면서까지 휘날렸던 태극기! 그들의 눈물겨운 장거가 과연 자신만을 위한, 혹은 강요된 행위의 결과였을까. 오늘날, 선진국의 문턱에 서 있는 한국 국민으로서 개인적 차이는 있겠지만, 이나마의 복락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모두가 그분들의 은덕임을 알아야 한다.
국기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대회 같은 경사 때에만 야단스럽게 흔드는 장식물이 아니다. 적잖은 우리 국민들이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자율은 책무 수행이 선행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듯 무감각하고 염치없는 사고에만 젖어있다면, 장차 어떻게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역사 그리고 동해와 독도를 지켜낼 수 있겠는가.
그날 현충일 아침, 한 초등학생 어린이가 도화지에다 손으로 서툴게 그린 국기를 막대기에 붙여 대문간에 게양하려고 애쓰던 모습이 그날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그 아이가 했던 한 마디가 지금까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엄마, 아빠가 국기를 안 달아서요!"
백종식 (시인·대구 구남여자정보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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