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닉 에세이] 해피메이커

입력 2007-06-14 16:33:27

시내에서 프렌차이즈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하며 자그마한 체구, 단정한 옷차림에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을 가진 이 어른이 오시면 나는 주제가 다른 두 가지 연설을 들어야 한다. 노인성 소양증으로 한 달이면 두 번은 오시는데 심각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귀찮은 병이니 만큼 진료 역시 꾸준히 그러나 가볍게 이어진다. 그러니 만큼 병은 뒷전이고 항상 서두는 예전의 명문 K여고와 관련된 여러 가지 근황들, 이를테면 동창회나 축제 혹은 졸업생들이 얼마나 잘 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실명도 자주 거론되어 솔솔한 흥밋거리가 제법 있다.

그다음 내용은 요가에 대한 보고다. 당신이 얼마나 규칙적으로 가는지 얼마나 유연하게 하는지 주변에 같이 운동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못하는지 장황하게 설명하신다. 내가 통 감을 못 잡는다 싶으면 직접 연출하시기도 하는데 좁은 진료실에서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다. 그래ㅓ 언제나 최선을 다해 맞장구친다. 요가센터가 우리 병원 근처라며 같이 갈 것을 종용하는데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으나 조만간 끌려 갈 것 같다. 외래가 바쁠 때는 "정원장, 내가 오늘 모임이 있어 바쁘거든..."하시면서 총알처럼 사라지고 외래가 한가하면 한바탕 퍼포먼스를 하신다. 그리고 항상 유쾌하고 즐겁다.

고희를 넘긴 연세에 자궁암이란 인생의 심연을 극복한 불굴의 의지만으로도 이제껏 살아낸 인생 여정이 충분히 가치가 있다.그 어른을 보면'노년이란 살아남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란 아름다운 글귀를 떠올리게 한다. 불혹을 넘기고 이순을 향해 막바지 달음질치면서 세상의 순리를 알기는커녕 아집과 독선만 늘어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나이듦에 대한 비애가 증폭되는 요즈음, 그 어른은 나의 해피메이커다. 어느 순간부터 레이저시술시 안경을 벗어야 하고 눈앞의 책들이 침침해지며 매일 오르던 뒷산이 힘에 부쳐서 서글플 때 그 어른은 나의 역할 모델이 되었다. 물론 조금만 덜 수다스러워야 하지만 말이다.

정현주(고운미 피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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