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지점장, 결재자에서 영업맨으로

입력 2007-06-14 10:17:58

▲ 대구은행 신암육교지점(동구 신암동) 최수원(51) 지점장. 지점장에 오른 지 벌써 10년이지만 그는 잠시도 앉아있을 틈이 없을 만큼 바쁘다. 사진은 최 지점장이 직원들과 함께 13일 오후 전략회의를 하는 모습.
▲ 대구은행 신암육교지점(동구 신암동) 최수원(51) 지점장. 지점장에 오른 지 벌써 10년이지만 그는 잠시도 앉아있을 틈이 없을 만큼 바쁘다. 사진은 최 지점장이 직원들과 함께 13일 오후 전략회의를 하는 모습.

"너희 아버지 뭐하시니?"

"응~. 은행 지점장이셔."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말투로)

"그래? 와, 대단하시겠다." (부러움이 가득한 목소리)

10여 년 전만 해도 이 같은 대화는 흔했다. 그만큼 은행 지점장은 '대단했다.' 기업들이 '바라고 바라는' 대출 권한을 쥐고 있고, 운전기사 딸린 자동차를 가졌던 사람. 게다가 고액의 연봉까지.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시대도 변했다. 은행 지점장실을 벗어나 손에 물집이 맺히도록 운전대를 돌리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는 사람들. 그들이 '요즘' 은행 지점장이다.

◆최 지점장의 하루

대구은행 신암육교지점(동구 신암동)의 최수원(51) 지점장. 그를 13일 오전 10시 30분쯤 은행 지점장실에서 만났다. 그가 앉아있는 방에는 '지점장실'이라는 명패도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방이 아닌 셈. 그는 PB룸이라고 얘기했다.

최 지점장은 올해 지점장 10년차. 신암육교지점은 지점장으로서 6번째 나온 곳이다. 양해를 구하고 이날 하루 그의 일정을 따라붙기로 했다.

몇 가지 결재를 마친 그는 기자를 데리고 오전 11시 30분쯤 자신의 승용차를 직접 몰았다. 그리고 대구 성서공단으로 향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지점장에게 차와 운전기사가 배정됐으나 이후 없어졌다고 그는 말했다.

20분 넘게 걸려 도착한 성서공단의 한 제조업체. "안녕하세요?" 그는 허리를 숙이며 1층 사무실 문을 열고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마치 영업사원이 책 팔러 온 것 같은 광경.

인사를 마친 그는 2층 사장실로 갔다. 이곳 사장과 놀러온 제조업체 사장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인사를 건네고 곧장 상품설명도 하고, 신용카드 한도 증액 서류도 꾸몄다. 곧 해외출장이 예정된 업체 사장에게는 친절한 환전설명도 있었다.

이후 부근 횟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갔더니 성서공단에 있는 사장들 3명이 더 와 있었다. 식사를 하며 간간이 그는 식사·대화에 방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부지런히 상품설명을 했다.

식사를 끝내고 계산까지 마친 그는 일행과 인사를 나눈 뒤 차를 타더니 한 업체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펀드 수익률이 30%를 넘었다."고 설명한 그는 "근처에 있으니 지금 공장 방문을 하겠다."고 말했다. 사장은 "멀리 있어 오늘은 안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는 이번엔 대구 3공단으로 차를 몰았다. 한 안경공장에 닿았다.

이곳 사장과 인사한 그는 여러가지 화제로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중 사장이 "알고 지내는 사람이 선물투자로 큰돈을 벌었다는데 나도 펀드를 하나 들고 싶다."고 했다. 곧바로 최 지점장의 설명이 이어졌고, 사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조만간 설명서를 들고 찾아오라."고 했다.

은행으로 돌아오는 차안. "은행 주변에 대한 영업은 지점의 책임자급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저는 은행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다니며 영업을 합니다. 지점장이 앞장서 영업을 하지 않으면 직원들이 따라오지를 않습니다. 제가 하급 직원이었을 때는 물론 상황이 달랐죠. 그때는 지점장님의 '권세'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변한 현실을 인정하고, 뛰는 수밖에 없습니다."

은행으로 돌아온 뒤 부근의 약국을 돌고, 책임자 회의를 하고, 그가 관할하는 파티마병원 출장소 방문을 끝낸 뒤 최 지점장은 하루 일과를 마감했다. 저녁엔 '철강업체 사장님'들과 모임을 갖기로 했다는 최 지점장. 그의 이날 일정은 오후 11시 30분쯤에야 끝이 났다. 그는 "솔직히 피곤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실적'만이 살아남는 세계

최 지점장은 대구은행 내 같은 그룹에서 실적이 1위다. 하위권에 있던 이 지점을 지난해 3위로 끌어올린 뒤, 올해 마침내 1위로 만들었다. 자신의 자동차 기름을 쏟은 만큼, 구두창이 닳은 만큼 실적은 찾아온다는 것이다.

실적을 내면 실적이 나쁜 지점장들보다 1천만 원 가까이 연봉도 더 받는다. 과거엔 연봉 차이가 적었지만 최근엔 갈수록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

실적이 나쁘면 '가혹한 보상'이 뒤따른다. 대구은행의 경우, '추진역'이란 자리를 만들어 실적이 나쁜 지점장은 지점장 자리를 박탈, 본점으로 불러들인다.

현재 대구은행에는 10여 명의 추진역들이 있다. 이들은 요즘 대구 동구 신서동 혁신도시에서 앞으로 벌어질 '토지보상금' 유치에 투입돼 있다고 대구은행은 설명했다. '맨투맨 영업'을 벌여 실적이 좋으면 다시 지점장으로 돌아가고, 실적이 또다시 나쁘면 '영원한 추진역'이 될 수밖에 없으며 최악의 경우, '보직 대기'라는 조치도 취해질 수 있다고 대구은행 관계자는 말했다.

다른 시중은행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농협은 지점장의 성적이 좋지 않으면 지점장 자리를 뺏어버린다. 그리고 부지점장 발령을 낸다. 최근엔 '발탁 인사'가 보편화돼 과장급 지점장도 속출하고 있어 자칫 나이든 부지점장이 젊은 지점장 밑에서 '수모를 겪는' 일도 빚어진다.

시중은행의 한 대구시내 지점장은 "과거엔 지점장이 대출을 할 때 결정권이 많았으나 요즘엔 이런 권리도 모두 본점으로 이관돼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세일즈맨이 돼버렸다."며 "연봉을 많이 받긴 하지만 '언제 잘릴지' 불안하고, 사람을 만나는 영업을 많이 하다보니, 내 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소연했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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