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대학 科(과) 자료실. 자료를 복사하느라 땀을 흘리고 있는데 갑자기 코끝에 와닿는 향기로운 내음. 김이 무럭무럭 나는 볶음밥 두 그릇이 바로 앞의 두 남녀 학생에게 놓였다. 평소 잘 아는 학생들이다. 두 사람은 쓱싹쓱싹 비비더니 주변의 다른 친구들과 (훨씬 연배 높은) 필자에게 한마디의 의례적 인사조차 없이 밥을 먹는다. (옛말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겠다.) 슬슬 고개를 내미는'섭섭병'에 그만 한마디 툭 던지고야 말았다. "어떻게 주변 사람들에게 식사했냐는 말 한마디 없이 그러냐"
갑작스런 질타에 머쓱한 표정이 된 두 사람이 모기소리만하게 묻는다. "식사하셨어요?" 그래도 분(?)이 덜 풀려 가시를 내민다. "그렇게 묻는데 안 먹었다고 하겠냐?" 그때부터 기가 죽은 두 사람, 음식 씹는 소리를 최대한 줄이며 조심조심 먹는 모습이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다. 한두 자녀 시대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밥맛 떨어지는 말을 한 것이 미안스럽기도 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흔히 하던 얘기가 생각난다. "섭섭한 일 많아지면 나이 드는 증거"라고. 별것 아닌 일로 걸핏하면 오해하고, 아이처럼 삐치고, 토라지던 주변 어른들을 떠올리다 보니 "앗, 어느새 나도…" 싶은 마음에 오싹거려진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사회엔 섭섭병 환자들이 수도 없이 많다. '내가 낸데'하는 自己愛(자기애), 자만심이 상처를 입어 섭섭병이 되고 '원망병', '화병'등으로 병증이 깊어간다. 우리네 訃告(부고)에 흔히 나오는 宿患(숙환)이란 용어를 병명으로 잘못 안 어느 외국인이 "한국인은 왜 모두'숙환'으로 죽느냐"라고 했다지만 '내 탓'보다는 '네 탓'을 잘하는 기질 탓에 섭섭병이 국민적 숙환이 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부부 불화도, 고부 갈등도, 돌아선 연인들도 결국 섭섭병이 원인이 된 경우가 많다. 요즘 연일 정치권과 언론을 향해 거침없이 화살을 쏘아대는 노무현 대통령도 어쩌면 쌓이고 쌓인 섭섭병 탓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시간, 하루 1분이면 충분합니다' 라는 공익광고 카피가 생각난다. '현관문 열어주는 시간 8초, 전철에서 신문 접는 시간 5초, 넘어진 자전거 일으켜 주는 시간 17초, 버스 타는 휠체어 돕는 시간 30초'. 누구나 걸리는 섭섭병엔 진심 어린 말, 정겨운 말 한마디가 최고의 명약이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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